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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종로 제2 직업소개소를 만난 것이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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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종로 제2 직업소개소를 만난 것이 행운?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3.12.09 08: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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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12>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직업소개소 직원에 이끌려 간 곳은 종로 2가의 큰 도로 육교 옆에 있는 종로 제2 직업소개소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에는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만 무허가 직업소개소가 5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들 무허가 소개소들은 신문광고 또는 막내 건달들을 고용하여 서울역과 고속버스 터미널에 상주시키면서 서울 이남 지역에서 무작정 올라오는 여성들과 10대 후반 청소년들에게 접근하여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현혹 시킨 뒤 소개소까지 데리고 갔다.

소개소 주인들은 데리고 온 여성들의 생김새에 따라 소개비로 1인당 3천 원에서 5천 원을 받고 윤락업소 포주들에게 넘기기도 하고 팔아먹는 인신매매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건달이 지배인으로 있는 요정이나 나이트클럽 또는 회관식 호텔의 문지기(일명 뽀이)를 비롯하여 청소 등 잔심부름꾼을 필요로 하는 업소에 1인당 천 원에서 2천 원의 소개비를 받고 최소 6개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조건부 취직을 시키기도 했다.

무허가 소개소들이 난립하면서 젊은 여성들의 감금 납치 폭행 등의 범죄가 심각했지만 무허가 업소들이 경찰에 단속되어도 단속법규 미비로 경범죄 처분만 받았기 때문에 무허가 소개소들과 윤락 포주들은 늘어만 갔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법천지가 되었던 무허가 직업소개소가 시골에서 올라오는 가출 청소년과 취업을 목적으로 올라오는 남녀 10대들을 유인하여 인신매매를 통해 그들의 꿈과 미래를 짓밟아 버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필자는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 있는 50여 개 무허가 직업소개소가 아니라 허가를 가진 6곳의 소개소 중 한 곳인 종로 제2 직업소개소에 직접 전화를 한 탓에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여하튼 필자가 도착한 그곳 소개소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반달형 긴 소파 형식의 의자에 남녀 10여 명이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모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팔려갈 인간상품 진열을 해 두었던 것이다.

소개소 소장이라는 사람이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사유와 이름과 나이만 물어보고는 학력 가족관계 고향 주소 등은 아예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와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처자들은 소파에 앉아 있기도 전에 하나둘씩 어디론가 바로 데려갔지만 그외 사람들은 미니 소파에 앉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그 인간 진열대 사이에 가서 앉아 있은 지 20여 분이 지날 무렵 건장한 아저씨 한분이 소개소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 분은 소장과 무어라고 말을 건네더니 곧바로 필자 앞으로 와서 이름만 물어 보고는 일어서라고 하더니 “너는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필자를 데리고 갔다.

그 아저씨는 필자를 데리고 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운 좋게도 나를 만나 행운인 줄 알아야 한다. 깡패들에게 끌려갔으면 돈은 고사하고 죽을 고생만 할 뻔했다.” 며 살벌한 서울의 직업 환경들을 대충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을지로에 있는 평화시장 입구 소고기 국밥집이었다.

필자가 아침밥을 굶었다는 사실을 안 그 아저씨가 국밥을 사주시는 것이었다. 평화시장은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 .탈색해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됐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시장은 전쟁 이후 청계천 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됐으며, 당시 상인들의 60%가량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었다.

그러나 1958년 이 일대의 대화재 이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은 평화통일을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에 따라 붙여졌으며 노동 운동을 했던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서 분신하기도 했다.

국밥을 먹고 난 뒤 도착한 곳은 시장 바로 뒤편 일본식 건물 2층짜리 큰 식당이었는데 필자는 그집 간판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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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實 2013-12-12 13:23:57
일본식 2층짜리 식당건물을 보면서 배고픈 넘이 배가 부르니 머시라꼬? 조유식이 살아온 것으로 보면 회고에 붙히는 말도 인정함. 이건 현재 이 시대의 법관의 판단보다도 더 유효하고 합당함. 판관 자처하는 이 영감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지만 큰소리 침. 何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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