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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보리쌀 3되에 노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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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보리쌀 3되에 노예가 되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3.11.04 17:5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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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7>

필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객지에 와서 나무꾼이 되어 나무를 팔아 번 돈으로 오색찬란한 꽃 고무신을 사서 여동생에게 선물했다.

꽃 고무신을 받아든 여동생이 좋아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꽃 고무신을 신고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했다. 이처럼 꽃 코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아이는 감천마을에서는 필자의 여동생이 처음이라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며칠 뒤 동네 친구들이 가을소풍을 간다고 하기에 필자도 엄마를 졸라 아이들을 따라 뺀도(도시락)를 싸서 소풍을 갔다. 윗집의 형님도 함께 가자고 했으며 나무를 사주었던 선생님도 반겨 주었다.

필자는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먼발치에서 졸졸 따라갔다. 소풍을 간 곳은 어느 산골의 개울을 끼고 있는 절이었다.

선생님께서 부처님께 착하고 공부 잘하도록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절을 하라고 하여 소풍 온 아이들이 모두 큰집(법당)에 들어가 가지고 왔던 용돈을 올려놓고 절을 했는데 아마도 엄마들이 용돈을 주며 시켰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필자도 소원을 빌며 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절 주위에 있는 돈 색깔처럼 물들어진 낙엽(단풍잎) 하나를 주워서 부처님께 올리고 작은 돌맹이로 눌러 놓고는 절을 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절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절 구경을 마친 아이들이 계곡으로 가서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필자는 그곳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도시락을 먹을 수가 없어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도시락을 풀었는데 그 도시락 속에는 밥이 아니라 사카리를 넣고 삶은 밀만 가득했다. 누가 볼까 걸어 다니며 밀을 퍼 먹었는데 참말로 맛이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본 가을소풍 추억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소풍을 갔다 온 다음날 엄마가 필자를 앉혀 놓고 당부를 했다.

"내일 동생을 데리고 어디 좀 갔다 올 끼다. 그러니 너는 어디 가지 말고 며칠만 기다리면 엄마가 데리러 올끼다 알겠제! " 이 말을 남기고 엄마는 동생과 함께 감천을 떠났다. 엄마가 떠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엄마도 동생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와의 두 번째 이별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이틀 배를 곯고 있던 어느 날, 엄마를 데리고 간 그 아줌마가 찾아왔다.

그 아줌마는 "너거 엄마가 윗동네 부잣집에서 보리쌀 3되를 꾸어가고 갚지 않아 그 집에서 보리쌀 3되 값을 갚을 때까지 너를 데리고 있기로 했다"며 필자의 손을 이끌고 그 부잣집으로 가 그 사람들에게 필자를 인수인계 시키고 가버렸다.

훗날 안 일이지만, 의령 정곡이 고향인 이 아줌마가 필자의 엄마를 의령에서 데려와 함안의 제법 부잣집으로 재혼 중매를 했던 중매쟁이였다. 엄마는 그 아줌마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믿고 있었겠지만 그 아줌마에게는 필자가 골치 덩어리였던 것이다.

보리쌀 3되의 볼모가 되어 약 8개월여 동안 필자는 설과 추석 명절 이틀만 빼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나무와 소 꼴을 배다 날라야만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어린아이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며 노예처럼 부려 먹는 그 노인네와 자식들 때문에 필자는 골병에다 이틀이 멀다 하고 낫에 손을 베어 피를 철철 흘리기 일쑤였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의 양 손가락과 손등에는 그때 다친 30여 곳의 영광의 낫 자국이 남아있다.

노인네가 갈아준 새파란 낫 날에 손을 베어 들어가면 주인네들은 "야 이놈아 너는 우째 맨날 배오라는 나무는 안 배고 손만 베어 오냐 바보 등신 같은 놈아" 하며 오징어 뼈를 긁어 그 가루를 상처 난 부위에 뿌려주고 난닝(러닝)구 천 조각으로 칭칭 감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자기들은 흰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밥을 먹으면 머슴들에게는 늘 찬 보리밥에다 매일 똑같은 시래기 된장국과 간장이 전부였다. 소처럼 부려 먹는 노예생활을 견디다 못한 필자가 옆집의 형님(고등학생)을 찾아가 누나를 좀 찾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필자는 그 형님에게 "우리 누나는 의령 정곡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의 자식이 없는 담임선생이 데리고 갔는데 그 선생님 성이 최 씨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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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촌놈 2013-11-12 18:11:29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는데 한번도 답례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큰 설픔을 당하셨는데 무심했습니다.
님께서 든저 주시는 화두공부를 통해 더욱더 사회의 등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도 촌놈 2013-11-12 18:11:29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는데 한번도 답례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큰 설픔을 당하셨는데 무심했습니다.
님께서 든저 주시는 화두공부를 통해 더욱더 사회의 등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도 촌놈 2013-11-12 18:11:29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는데 한번도 답례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큰 설픔을 당하셨는데 무심했습니다.
님께서 든저 주시는 화두공부를 통해 더욱더 사회의 등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도 촌놈 2013-11-12 18:11:29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는데 한번도 답례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큰 설픔을 당하셨는데 무심했습니다.
님께서 든저 주시는 화두공부를 통해 더욱더 사회의 등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도 촌놈 2013-11-12 18:11:16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는데 한번도 답례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큰 설픔을 당하셨는데 무심했습니다.
님께서 든저 주시는 화두공부를 통해 더욱더 사회의 등불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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