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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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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식의 허튼소리-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희망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13.10.28 1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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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력 '무학'으로 기자가 되기까지<6>

감천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필자에게 한 제안은 다름 아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필자가 5대 1로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힘깨나 쓰는 아이라고 판단하셨던 모양이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마다 감천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삭다리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고 마산으로 가는 고갯길인 만날 고개를 넘어 마산으로 가서 팔고 온다.

만날제 고갯길을 내려 가다 보면 큰 당산나무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나무를 사가니 너도 나무를 팔아 돈을 벌어 가며 학교를 다녀 보라고 하시기에 필자는 선생님께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운동장을 날듯이 뛰어다니다가 집에 왔다. 감천마을은 산세가 높고 바위가 많은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수입으로 바위타기를 좋아하는 염소를 바위산에 올려 보내 키우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염소가 바위산에서 숙식을 하기도 하지만 가끔 늑대들에게 공격을 받아 희생당하는 염소도 많았다. 염소가 늑대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단체로 크게 울어 되며 위험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연결된 끈을 당기고 흔들어 집집마다 매달려 있는 깡통 소리로 비상소집을 하면 마을 사람들은 대나무 죽창을 들고 마을 앞으로 모여 산으로 올라가 늑대를 쫓아 버리기도 했다. 이처럼 늑대가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대낮이라도 여러 명이 함께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곤 했다.

필자도 선생님과의 약속대로 마을 형들로부터 작은 지게 하나를 빌려 등에 지고 형들을 따라 삭다리(마른소나무가지) 나무를 하러 갔다. 필자는 나무에 올라 갈 수가 없어 바닥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모아 두면 형들이 칡넝쿨로 꽁꽁 묶어 지게에 올리고 또 묶어 준다. 이렇게 단단하게 묶어야 마산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형들 따라 나무 짐을 지고 참으로 오랫동안 걷고 또 걸어 만날 고개를 조금 넘어서자 왼쪽 팔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 나무 짐 검사를 했다. 그 사람들은 삭다리 나무 짐이 조금 크게 묶여 있으면 여지없이 낫으로 새끼 줄을 끊고 나무 짐을 풀어 헤쳐 그 속을 검사했다.

그 모습을 본 필자도 겁이 나서 다리를 후덜거리고 있는데 그 완장 아저씨가 "야 꼬마야 니는 그냥 가도 된다" 하며 통과시켜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른들의 나무 짐 속에는 당시 불법인 참나무를 땅에 파묻고 태워 숯을 만들어 나무 짐 속에 숨겨와 비싸게 파는 사람들이 많아 시골에서 오는 나무 짐을 풀어 헤쳐 단속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단속 아저씨들이 필자의 나무 짐이 너무 작아 그 속에 숯이 들어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냥 보내 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형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단속 장소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당산나무가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마산 합포구 예곡동과 월영동 주변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께 온 마을 아저씨들의 삭다리 나무 짐은 금방 다 팔렸지만, 필자의 나무 짐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무 짐 이래야 각시 베개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으니 누가 살려고 했겠는가? 잠깐이었지만 그 선생님이 조금씩 원망스러워질 무렵 그 선생님이 나타 나셨다.

"이~야! 선생님은 니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잘 왔구나, 그 나무는 내가 살게" 라며 나무 값을 쥐어주고는 "조심해서 잘 가라" 하시고는 나무 짐을 한 손으로 달랑달랑 들고 당산나무 옆길로 가셨다. 다음 일요일에 또 나무 가져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시고 말이다.

선생님이 주신 나무 값 30원! 필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노력해서 손에 쥐어본 값진 돈이었다.

돈을 움켜쥐고 한참을 울다가 형들 따라 시장으로 가서 20원 주고 여동생의 꽃고무신 한 켤레를 사서 품에 꼭 안고 감천으로 돌아오는데 어찌 그리 기분이 좋던지 지금도 그 기쁨을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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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實 2013-10-30 21:28:54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시절 이바구 참 재미 있습니다. 그림이 환히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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