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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파헤친 ‘제4의 제국’ 가야사… 남방불교 도래 검증이 복원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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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파헤친 ‘제4의 제국’ 가야사… 남방불교 도래 검증이 복원의 시작이다
  • 최문복 지역기자
  • 승인 2026.11.04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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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372년 불교 전래설 너머… 가야 남방불교 도래, 왜 연구조차 부정당해야 하는가?
장유사·은하사·해은사·왕후사·흥국사부터 지리산 칠불사, 가야산 칠불봉, 밀양 만어사까지 증거 수두룩
일제강점기 파헤쳐지고 왜곡된 가야사 바로잡는 핵심 과제이자 국가적 검증 사안
챗GPT 생성.

■ ‘372년 불교 전래설’에 대한 의문... 국가적 공인인가? 최초의 불교문화 유입인가?

한국 불교사에서 서기 372년은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고 기록된 중요한 기준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개념이 있다.

372년은 고구려가 불교를 ‘국가적으로 수용·공인한 시점’이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전체에 ‘불교적 사상과 문화가 처음 스며든 유일무이한 시점’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바다를 통해 사람과 물자가 활발히 오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 문화와 사상이 단 하나의 육상 경로로만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역사적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북방불교 유입 이전, 남해안 해로를 통한 가야로의 불교 유입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기존 통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자연스러운 학술적 확장이다.

■ 실존하는 수많은 사찰과 지명... 어떻게 다 부정할 수 있나?

가야의 남방불교 전래설은 결코 허공에서 나온 황당무계한 주장이 아니다.

김해와 지리산, 가야산, 밀양, 양산 등 광범위한 지역에는 가야 왕실 및 허왕후, 장유화상(허보옥)과 연결된 수많은 불교 유적과 지명이 이천년 가까이 지역사회의 터전으로 뿌리내려 있다.

가야 왕실 창건 사찰과 고문헌 기록은 너무나 많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난 자리에 창건했다고 기록된 왕후사(王后寺)의 존재가 명백히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서기 50년 수로왕이 허왕후의 무사 도래를 기리며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김해 흥국사(興國寺)와 수로왕·허왕후의 영정을 모신 해은사(海恩寺), 신어산 은하사(銀河寺), 수로왕이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모은암(母恩寺)과 부은사(父恩寺) 등 가야 왕실과 직접 연계된 사찰군이 김해와 인근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의 법명을 그대로 딴 김해 장유(長游)동과 최초의 전파지로 전해지는 장유사, 수로왕과 허왕후의 일곱 왕자가 출가하여 성불했다고 전해지는 지리산 칠불사(七佛寺)도 존재한다.

가야의 영산인 가야산의 최고봉 칠불봉(1,430m) 역시 이 성불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한 대표적인 지명적 물증이다.

동해 용왕과 가야 수로왕의 불교적 인연 및 만어석 전설이 서린 밀양 만어사(萬魚寺), 장유화상이 연못을 메워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등 가야 문화권 전역에 왕실 인물 및 전승과 연결된 사찰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문화적 물증으로 한반도 고유 화강암이 아닌 인도·동남아 계열의 특유 사암으로 밝혀진 파사석탑, 인도 아요디아 문양과 일치하는 쌍어문(두 마리 물고기 문양),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문헌 기록까지 실존하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이처럼 구체적인 유물과 사찰, 지명이 현존함에도 “문헌 기록이 후대에 윤색되었다”거나 “단순한 설화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들어 역사학의 검증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방임이자 오류다.

■ 반론은 당연히 존재할 수 있으나 ‘부정부터 하는 태도’는 납득할 수 없다

역사 해석에 있어 반대 의견이나 신중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후대에 사찰 사적기가 윤색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거나, 공인된 국가 종교로서의 성격인지에 대한 학술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학계나 주류 역사학은 수많은 유적과 기록을 정밀하게 조사하고 과학적으로 검증해보기도 전에, “372년 소수림왕 때가 최초”라는 기존 통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야 남방불교 관련 자료 전체를 일단 부정하고 외면부터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가야문화진흥원(통도사 승가대학 학장 초대 이사장 인해 스님, 김해 불인사 주지 2대 이사장 송산스님, 범어사 성보박물관 부관장 3대 이사장 도명 스님, 장유사 주지 현 4대 이사장 해공 스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야불교 재조명 운동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스님들과 지역 사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가야불교를 무조건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로 올려달라”는 맹목적 요구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유적과 기록, 지명이 남아있는데 왜 가야불교를 검증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외면하는가”라는 정당한 질문이다.

■ 일제에 의해 파헤쳐지고 왜곡된 ‘제4의 제국’ 가야사를 바로잡는 길

가야 남방불교를 둘러싼 무조건적인 부정의 태도를 깨트리는 것은 단순히 불교사의 연대를 몇백 년 앞당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임나일본부설 등 식민사관에 의해 수많은 가야의 고분과 유물이 무단 도굴·파헤쳐지고 의도적으로 축소·왜곡되었던 '제4의 제국' 가야 500년의 역사를 바로잡는 핵심적인 사업의 일환이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심의 승자 기록과 일제의 잔재에 밀려 왜곡되어 온 가야 역사를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가야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재조명이 필수적이다.

가야불교를 연구하는 순간, 대상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가야 왕실의 체제, 대외 해상 교역망,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의 국제 관계, 가야인의 문화적 정체성으로까지 확장된다.

2023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이 증명하듯,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 동남아, 인도와 끊임없이 교류했던 해상 교역 국가 가야의 진면목을 바로 세우는 핵심 열쇠가 바로 가야불교 연구다.

■ 무작정 믿으라는 게 아니라 있는 증거조차 부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제대로 연구하라

역사는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파손되고 묻혀버린 가야의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정부와 학계, 지자체는 이제 가야 남방불교 문제를 국가 차원의 종합적 가야사 복원 연구 과제로 격상시켜야 한다.

▶ 『삼국유사』 등 관련 사료의 편견 없는 재검토 및 왕후사터 등 유적 발굴·사료 형성 계보 분석

▶ 김해(은하사·해은사·장유사 등), 지리산, 가야산, 밀양, 양산 등 가야 문화권 사찰·지명에 대한 고고학적 종합 조사

▶ 파사석탑 석재 성분 및 암석학적 산지에 대한 현대 과학적 교차 검증

▶ 쌍어문 등 문화 요소와 남아시아·동남아 문화권 간의 시기별·양식별 비교연구

▶ 일제강점기 훼손·왜곡된 가야사 자료에 대한 원형 복원 및 고대 동아시아-남아시아 해상 교역 네트워크 연구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야불교를 무조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가능성과 눈앞에 실존하는 수많은 사찰과 유적, 지명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정식 역사학의 테이블 위에서 제대로 연구하고 검증하자”는 것이다.

일제가 파헤치고 덮어버린 어두운 장막을 거두고, 승자의 기록으로 매몰되어 버린 역사의 파편들을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재정립할 때, 비로소 우리는 바다를 품고 세계와 소통했던 당당한 제4의 제국 가야의 진정한 역사적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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