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가락 종친들의 무관심 가락국 시조 대왕 탄강지 구지봉의 수난 <1>
일제 강점기 수로왕 후손들과 김해의 정기를 끊고자 목 부분 절개 도로 개설
정상 주변 일제 강점기 신축된 콘크리트 정수장과 쇠 파이프 수도 관로 매립
1989년 월간 금관가야 조유식 발행인, 김해불교청년회와 구지봉 원상 복원 촉구
1992년 잘려 나간 구지봉 거북이 목 부분 왕비 능 몸통 부분 산과 연결 터널 완공
콘크리트 구조물 정수장 물탱크 2곳 상부 덮게만 철거하고 나상지 그대로 매립
가락국 수도 김해의 대표적인 역사ㆍ문화의 상징 사적지가 바로 구지봉이다.
7백5십만 후손을 두고 있는 가락 건국 시조 대왕이 구지봉에서 태어났으며 가락국 국왕이 되어 500년 동안 가락국을 통치하고 6가야의 대국이 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구지가와 관련된 수로왕의 이야기와 건국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본래 김해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고 하며 본디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AD 42년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라는 곳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마을 사람 3백여 명이 거기에 모이자, 다시 그 수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누구 있느냐?"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구간들이 답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하늘이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하였다면서 산꼭대기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라고 하였다.
그러면 곧 대왕이 내려올 것이라는 말에, 구간들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윽고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드리워져 땅에 닿는데, 그 끝에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다고 한다.
그 속에는 6개의 황금색 알이 있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구간들은 다시 보자기로 싸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2일이 지난 그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어린이로 변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수 일이 지나자, 이들의 키가 9척에 이르게 되었고, 이 중에서 수로(首露)가 그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라 가락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5명의 아이도 각자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화답으로, 구간들과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구지가였다. 이러한 구지가를 통해 당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제례 의식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노래하며 춤을 춘다는 것은 당시 제례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행위였는데, 구지봉에서 하였다는 것은 애초에 이 장소가 제례 의식이 주로 일어났던 장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화에서 나오는 신이적인 의미를 걷어 내더라도 구지봉이 당시 가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국가 운영에 제례의 중요성이 어떠하였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
이처럼 구지봉은 여섯 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역사 유적지로서 국내외 관광객은 물론 김해 시민 학습의 장으로서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구지봉의 정기를 끊기 위해 구지봉 정상 부근에 조성한 정수장 시설과 구지봉 목 부분을 상징하는 봉우리 동편 산 일부를 잘라내고 도로를 개설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부터 김해에 큰 인물이 나지 않고 자랑할 만한 성공한 경제인 한 명 없는 도시가 되었다.
특히 승승장구하던 공화당 사무총장 출신 김택수 국회의원과 한일합섬의 몰락을 지켜본 배석현 김해불교 신도회장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구지봉 복원을 촉구했다.
이에 동조한 월간 금관가야 잡지사를 운영하던 조유식 김해불교청년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해시와 김해시장을 압박하여 결국 끊어진 구지봉부터 아래쪽에 터널을 조성하여 도로를 보존하는 조건으로 일부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1995년 금관가야 집중 보도로 구지봉 정상 부근 정수시설을 철거했고 수도관 쇠 파이프는 전부 철거하여 복원했다.
하지만 일제가 파묻어 놓은 정수장 탱크와 1935년 김해 읍이 추가로 설치해 놓은 물탱크는 완전 파들어내지 않고 위 상단 부분만 철거하고 나머지는 매립해 버려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요구했던 일본인들이 구지봉 정상 바로 아래 주변에 심어 놓았던 일본 아카시아와 일본 국화 벚꽃은 모두 뿌리째 뽑아 구지봉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했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식재했다.
기가 찬 것은 당시 김해 출신 정치지도자 다수가 수로왕 후손들이었는데도 어느 누구도 앞장서지 않고 방관만 했다.
조유식 금관가야 발행인이 가락중앙종친회 회장 앞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며 구지봉 복원에 앞장서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구지봉 훼손을 보도한 월간 금관가야 잡지를 전국 종친회장들에게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격려 전화 한 통 없었고 김해시에 항의 전화 한 통 없었다는 것이 당시 담당 공무원의 말이었다.
자신들의 시조 대왕 탄강지가 망가지고 훼손되어 기운도 정기도 사라졌지만, 후손 그 누구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무관심과 외면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구지봉과 가야의 역사와 유적 유물 문화 등 가야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지만 가락 종친들은 눈 감고 귀 막고 입 봉한 채 김수로왕과 종친회 팔아 권력 욕심 재력 욕심 명예 욕심 채우기에만 분주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