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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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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과 의미
  • 조현수 기자
  • 승인 2016.02.25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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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의 숨결 가야문화 학술대회가 `가야문화 원형의 탐색과 콘텐츠화`를 주제로 지난 16일 가야대학교 대강당 국제 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김해 여여정사가 주최하고 동명대학교 문화 융ㆍ복합 콘텐츠 연구소가 주관했으며 가야대학교가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는 제1발표: 가야불교 전래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황정일 박사ㆍ보조사상 연구원, 기획실장) 제2발표: 불교의 가야 전래에 대한 일연의 인식과 가야불교의 성격(석길암 교수ㆍ금강대학교) 제3발표: 기원 1~3세기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한지연 교수ㆍ금강대학교) 제4발표: 가야시대 부산지역 불교에 대한 예비적 검토(이근우 교수ㆍ부경대학교, 부산경남 사학회 회장)가 발표를 했다. <편집자 주>

고대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과 의미

1. 가능성 제시

현 학계에서는 북방루트를 통해 한반도에 불교를 비롯해 교류를 통한 여러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 사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북방루트의 중심에 서 있는 중국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인도와 한반도에서 문자를 이용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 중국에 비해 후대로 내려오기 때문에 고대 교류사를 추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기원전부터 해상을 통한 교류가 존재했음은 이미 중국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외에 각종 지리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중국 측의 여러 기록들을 통해 인도-동남아시아-중국을 연결하는 해상루트는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 중국의 광주지역을 동단(東端)으로 상정하고 이로써 마무리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동단’의 개념이 동쪽 끝단으로 이용되어 문물 교류 역시도 여기서 끝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동단의 개념은 주변부로의 확산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특히 문물 및 문화 교류에 있어서는 더욱 이와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이 고대 해상루트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언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대 가야국에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에 대해 경제교류사와 문화사적 측면에서 접근해본다. 가야국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철기문화가 시작되고 있었고 좀더 선진화된 철기문화 소유 영역이 활발한 교류상황을 맞이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비단 철기문화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동일한 구조로 세계 정치경제권이 움직이고 있다.

단, 이때 주의를 요하는 점은 사서에 등장하거나 유적 및 유물로 남을 수 없는 일상생활에서의 물품들이 교류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거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경 지역에서 관세를 부가하던 관리가 두 바퀴 중 하나의 바퀴가 빠진 수레에 농산물과 녹슨 농기구를 실어 나르던 허름한 노인에게 관세를 부가할 항목이 없다고 판단했다가 뒤늦게 바퀴빠진 수레와 농기구가 ‘수출’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려 본인이 대신 관세를 냈다는 이야기와 같이 일반 물품이 교류 중심이 있는 것이다.

김해지역에서의 양질의 철 생산과 공예는 한반도 내에서도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해상 루트를 통한 교류의 선상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인도에서는 발빠르게 경남 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가야와의 교류를 시도했고, 이것이 바로 허황후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고대 사회에서의 국가 대 국가의 ‘결합’은 곧 정치‧경제적 배경에 의해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동맹과 혈연관계의 유지를 통한 새로운 질서 수립이 목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야국의 선진화된 철기문화는 해상 교역로를 활성화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과 동시에 인도 및 인도에 흡수되어 있던 여러 문화가 가야국으로 새롭게 수용되었다. 쌍어문(雙魚紋)의 경우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신(神)과 왕에게 쓰여진 문양이며, 이에 영향을 받은 인도 등지에서 애용되던 문양이 허황후의 등장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구슬을 들고 왔다는 기사를 통해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생산, 제작된 물품들이 가야국에 수입되었다는 점을 근거,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암각화에서 보이는 내용과 표현법들과의 관계성을 토대로 해상 교역로를 통해 멀게는 페르시아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가 그 당시 형성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해상교역로의 형성을 통해 인도의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보여진다. 불교국가였던 아유타국의 공주가 도래했다는 점은 북방 실크로드의 탁실라국의 민족이 이동하여 호탄국을 설립시키면서 동일 민족, 동일 사상, 동일 문화를 형성시켰다는 점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이미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시점이라는 점이 가야국에 대승불교 성격을 지닌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물론 현재의 관점으로는 동남아시아가 소승불교권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성과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같이 동남아시아에 대승불교가 존재했음을 감안해 보는 것과 동시에 대승불교 자체가 갖는 역동성을 고려해본다면 가야국에 전해진 불교의 성격을 소승불교라는 개념으로 확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본고를 통해 고대 해상교역로의 적용범위를 가야국까지 확대해석할 수 있는 점, 가야국의 선진 철기문화 도입을 위한 아유타국의 접근이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민족의 ‘결합’을 통한 문화의 선진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가 전해졌으며, 전해진 불교의 성격이 소승불교라 단언하기 힘들며 대승불교였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2. 고대 해상로에 대하여

인도와의 교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주로 육로를 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이는 기원전부터 서역에 대한 경영권 확보를 위해 중국과 흉노 등의 각 민족들이 서역제패를 위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해로를 통한 교류를 언급한 것은 극히 드물며, 그 또한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원전3~4세기의 내용을 추정해볼 수 있는 해상로에 대한 기록을 우선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해상로에 대한 단초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역사서 가운데 '한서(漢書)'의 내용을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꼽을 수 있다. 한 무제(武帝) 원정(元鼎) 6년(기원전 111년), 해상로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편(龍編) · 교지군(交趾郡) · 구진군(九眞郡) · 남해군(南海郡) · 담이군(儋耳郡) · 울림군(鬱林郡) · 일남군(日南郡) · 주애군(珠崖郡) · 창오군(蒼梧郡) · 합포군(合浦郡) 등 총 10개 지역을 한나라 영역으로 영입시켰다.〔지도1 참조〕

〔지도1〕 한시대 영역

이는 교주(交州)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지정학적 위치상 멀게는 로마 및 페르시아 지역에서 출발하여 서남 및 동남아시아를 통과하여 육지에 다다르는 해상로에서 ‘동단(東端)으로의 중간지점’에 해당된다. 주지하다시피, 한 무제 시기에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서북방면으로 서역을 경영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였다는 점 등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중국 남부지역까지 통일 영역으로 귀속시켰다는 점은 중국 남부에 형성되어 있는 외국과의 교역로 역시 한나라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정보가 수집되었다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때문에 기록에 보이고 있는 한 무제 원정6년인 기원전 111년 이전부터 해상로가 존재했고 더 나아가 활발한 교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해상로의 중요성은 비단 한나라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교주(交州)와 익주(益州)는 각각 오(吳)와 촉(蜀) 일부에 해당되며, 해상로에서 주요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주는 특히 오나라의 주요 영역으로 영입되어 있다.〔지도2 참조〕

〔지도2〕삼국시대 영역

'삼국지(三國志)'에 의거해보면, 오나라의 영역은 크게 양주(揚州), 형주(荊州), 교주(交州)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이 가운데 교주에는 건흥(建興) 7년(258)부터 오나라 자사가 파견되었고 교주는 구체적으로 용편(龍編) · 합포군(合浦郡) · 주애군(珠崖郡) · 교지군(交趾郡) · 신창군(新昌郡) · 무평군(武平郡) · 구진군(九眞郡) · 구덕군(九德郡) · 일남군(日南郡) · 구진속국(九眞屬國) · 일남속국(日南屬國)의 11개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이와 더불어 익주의 경우는 촉나라의 영역에 일부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익주에 해당되는 행정구역은 낙현(雒縣) · 면죽(綿竹) · 성도(成都) · 한중군(漢中郡) · 광한군(廣漢郡) · 건위군(犍爲郡) · 무도군(武都郡) · 월수군(越嶲郡) · 익주군(益州郡) · 장가군(牂柯郡) · 파군(巴郡) · 촉군(蜀郡) · 문산군(汶山郡) · 침려군(沈黎郡)의 총 14개이다.

이와 같이 한나라 시대 교주를 해상로의 주요 거점으로 이해, 영입했던 것을 시작으로 삼국시대에는 오와 촉이 이 지역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가야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맺어지는 시기 해상로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기본적인 사안을 사서를 통해 확인한 상태에서 대두될 수 있는 문제는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해상영역이 해상로를 통한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를 풀기 위한 여러 방면의 노력 가운데서도 특징적인 한 가지가 바로 “쌍어문(雙魚紋)”일 것이다.

쌍어문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기원했는가의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김병모 교수는 쌍어문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했으나 인도-중국 남부지역-가야에 이르는 루트를 상정한 상태이다.

그러나 쌍어문은 현재 고대 해상로 상에 위치하고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국가에서만 발견되는 문양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광의적 개념으로의 실크로드 전역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유타국에서 가야국 사이의 루트에서만 통용되는 신화적 의미를 담은 문양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크로드로 정의되는 세 갈래의 루트에서 나타나고 있는 쌍어문에 대한 그 원형은 메소포타미아, 즉 수메르인의 문명 속에서 찾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수메르(Sumer)의 신화(神話)와 그 속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세계의 각 종교에 모티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가운데서도 물과 관련된 용어가 많고, 관련 신화도 발견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티그리스 강(Tigris River)과 유프라테스 강(Euphrates River) 사이의 비옥한 땅에 터전을 잡고 있던 수메르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범람하는 강을 관리하며 농업용수와 식수 공급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지도3〕참조

〔지도3〕수메르인의 영역

 그러나 비옥한 땅만을 보유한 이들은 신전 및 궁전 설립 등에 필요한 물품을 비롯해 국가운영에 필요한 재정의 상당부분을 교역에 의존해 해결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도 모헨조다로 도시 유적에서 수메르에서 만든 실린더형 도장과 수메르산 활식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수메르인의 흔적은 기원전 3000여 년 무렵부터 주변 국가와의 빈번한 교류의 흔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원전 3000~10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로 번역된 선박 기술서에서는 크기, 행선지, 사용 목적에 따라 105종에 이르는 수메르 선박 종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교역의 방식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이루어진 교역과 더 나아가 해상을 통한 교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신전에서 발견된 부조물의 내용에서 쌍어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1〕

물고기에 해당되는 수메르어인 “a”가 그들이 신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짠물의 신’ 엔키가 관장했던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세운 ‘하아키’(A.A.KI 물고기의 집)라는 의미에도 바다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바다의 신이었던 그는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를 만드는 등 인간의 편에서 인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물론 순수하게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엔릴과의 경쟁구도가 존재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바다의 신 엔키에 대한 수메르에서의 신앙심은 구약성서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엔키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역시 물고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함에 따라 쌍어문이 등장하는 것이 특별히 물고기를 숭배하는 것보다 바다의 신을 숭배하는데 더불어 나온 문화의 현상화라 보여진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 이서以西 지역에서도 쌍어문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출토된 유물과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메소포타미아가 쌍어문 사용지의 서단西端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쌍어문을 비롯한 다방면의 문화가 해상교류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로 전해진 사실까지 확인하였다. 여기서 다시 중국 한나라 이후부터 지속되는 해상로의 경유지로 김병모 교수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교주에 해당되는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국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문(文)은 일남군 서권현의 이수인 범추의 노예였다. 어느날 소를 데리고 계곡에 갔다가 잉어 두 마리를 잡았는데, 잉어가 변신하여 철이 되어 이것을 가지고 칼을 만들었다. 칼이 완성된 뒤 큰 돌산에 대고 주문을 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잉어가 변신하여 이것으로 쌍칼을 만들었다. 만약 돌산을 깨뜨릴 수 있다면 이는 신령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는 돌산을 향해 힘껏 내리치니 돌이 곧 기왓장 쪼개지듯 부서지고 말았다. 문은 이 칼이 신령하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 깊이 고이 간직했다. 장사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면서 상국의 제도와 문물을 보았는데, 임읍에 와서 범일에게 궁실을 짓는 법, 기계를 만드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위의 내용에서 짐작해볼 수 있는 내용은 앞서 살펴보았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 내용과 후한대에 시작된 철기보급으로 인한 영향이 중국 남부 지역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철기와 가야와의 관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통해서도 낙동강 유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라리(舍羅里)130호분에서 검, 동경, 옥 등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발견된다는 점은 양동리(良洞里) 162호분에서 출토된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이 건무 21년(45), 영평 12년(69) 명(銘)이 있는 칠배(漆杯)와 칠반(七盤)과 함께 제기로 사용, 부장된다는 점 등은 낙동강 유역, 즉 가야지역에서 철기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쌍잉어가 쌍칼로 변화한다는 점은 신화에 등장하는 쌍어의 신비로움과 당시 철기의 사용에서 받아들여지는 경이로움이 함께 드러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인도, 중국, 가야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신화․문명․문화적인 해상로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해상로의 영역, 범주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대해 시기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쌍어문의 시발점으로서의 메소포타미아의 가능성을 제기하였고, 이것이 인도와 중국에서 신화적으로 사용된다는 점과 후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철기보급과 문화의 형성이 가야를 해상로의 범주로 포함되게 하였다는 결론을 내려보았다.

이와 같은 해상로를 바탕으로 인도 아유타국과 가야와의 연관관계, 그리고 전래된 불교가 한국불교 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한다.  

3. 한국적 불교의 시작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맺어지는 시기, 중국 보주지역은 삼국 가운데서도 촉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허황옥이 실제 보주로 이동이 된 것인지, 혹은 인도 아유타국에 조상을 둔 보주 출신의 아유타국 공주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때문에 이를 밝히기 위한 그간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연구는 김해지역의 역사와 더 나아가 고대 해상교류를 통한 문물,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그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교류의 단면을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첫째, 메소포타미아-인도-중국에 이르는 문명의 흐름과 둘째, 가야의 철기문화가 인도 및 중국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배경으로 밝혀보았다.

앞에서 밝힌 두 가지 문제는 허황옥이 인도 혹은 중국에서 출발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야와의 해상교역이 필요조건으로 부상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결합은 필수불가결한 시대상황의 결과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허황옥을 통해 전해진 불교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가야불교에 대한 연구는 여러 문헌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재차 이 문제를 상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 대신 본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아유타국 출신의 공주인 허황옥과 혼인을 맺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해진 불교라는 것이다. 둘째는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이분화시켜 어떤 성격의 불교가 들어왔는가라는 문제보다 중국의 변용된 불교가 아닌 인도불교의 직접적 전파라는 것이다.

논자가 주목하고 있는 첫 번째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서술하자면, 중국불교의 시작과 가야불교의 시작을 비교해보아야 할 것 같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은 혼인을 이용한 혈연관계 형성을 통한 예는 없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과 그와 관련된 여러 기사들이 다양하게 나타나 지금까지도 어떤 전설이 확실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시점과 내용을 규정짓지 못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과 부합하여 특이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다.

이로 인해 위서(僞書)를 만들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정도로 불교도 측에서의 중국내 활동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위진(魏晉) 시대의 위서인 󰡔열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가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잠시 있다가 말했다. “저는 서방에 성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러워지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신뢰하게 되며,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합니다. 그 덕이 너무나 넓어서 백성들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즉, 공자도 부처를 알고 있었다는 위조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 당시 사상계의 조류와 연결시키려 한다는 점은 중국 사상계의 우월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불교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요청되는 구조였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중국불교 시작의 이러한 면모는 중국 내에서 불교가, 혹은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의 입장에서 불교를 대변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중국불교의 시작점과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의 시작 역시 비슷한 양상을 갖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가 모두 공인연대를 기준으로 불교전래 시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곧 ‘국교화(國敎化)’라는 공식적 입장을 뜻하는 것이고 민간교류를 통해 이미 민간에서는 불교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김용덕이 그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종교처럼 체계적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고등의 문화는 외형적인 수입의 절차 없이도 의도적인 포교의 욕구로 인하여 쉽게 타민족이나 국민에게 스며들 수 있는 상황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민간교류 차원의 배경은 중국 및 한국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고,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기존의 정치․사회․사상적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가야의 경우도 역시 이러한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내용을 보면

금관 호계사에 있는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 시절에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 건무 24년 갑신년(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향하다가 파신의 노여움으로 건너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 하였다. 그리하여 무사히 바다를 잘 건너 금관국의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다. ……

수로왕이 왕비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절을 짓거나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아직 상교(像敎)가 전해지지 않아 이 땅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락국본기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위 탑상편의 기록은 다분히 불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로 쓰여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허황후가 출발하게 된 경위와 선박에 붉은 깃발을 달고 왔다는 내용 등은 앞선 '가락국기'의 내용과도 부합하기 때문에 김수로왕과 허황후 만남의 계기와 장면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 보이진 않는다.

따라서 위의 기록을 통해 논해야 할 점은 허황후가 가야에 들어오기 전까지 불교가 전래되어 있지 않았으나 통치계급간의 혼인을 통한 불교전래라는 사실과 불탑을 통한 전래방식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 논할 점인 허황후가 가야에 들어오기 전까지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여타의 국가와 비교했을 때 가야불교 시작의 특수성으로 작용될 수 있다.

전파지역의 사회적 구조 혹은 시대 사상조류에 대한 고민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불교 측 입장이 존재하고, 이를 반영되는 여타 국가들의 예에 비해 기록상에 보이는 가야국으로의 불교전파 양상은 전파지역에 대한 불교 측의 고민이나 특수한 목적의식보다는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때 기록의 사실 진위여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북방 실크로드의 여러 오아시스 고대 국가, 중국, 한국의 불교전래의 시기와 방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 모두 가야불교 전래기록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야를 제외한 나머지 불교 전래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앞서 언급한 여타의 다른 정치, 사상, 외교 등의 목적성이 다분히 섞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가야불교의 시작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따라서 전래 설화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는 ‘기록’에 대한 사실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가야의 불교전래는 교류와 그 속에서 진행된 혈연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유일무이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중국에 이르는 신화적 해상교류, 중국과 가야에 이르는 철기문명 교류의 해상루트를 본다면 이 역시 가야의 선진화된 철기문화 보급을 위한 특수 목적성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 전파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존의 종교 전파 양상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특이할 만한 점이다.

지금까지 큰 카테고리 속에서의 첫 번째 문제를 다루었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인 대승과 소승보다 의미 있는 인도에서부터의 직접적인 불교 전파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우선 김수로왕의 통치시기를 추정해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건국설화에 보이는 것으로는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42)에 김수로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원후 1세기 무렵을 가야의 시작점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158년을 통치했다는 걸림돌이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사라리 고분과 양동리 고분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미 이 무렵에는 ‘지배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으며,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하였으니, 1백호에 7만5천 명이었다. 대부분 산이나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일궈 먹었다. …… 즉위 2년 계묘년(43) 봄 정월, 왕이 말했다. “짐이 도읍을 정하려 한다”

위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호수와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사회계급이 나누어지며 위의 기록 이후에 등장하는 탈해를 위협세력으로 간주하는 내용 등으로 보아  ‘초기국가’라는 성립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적어도 기원후 1세기 후반기 무렵에는 가야의 국가적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합 역시 이 무렵으로 상정이 가능할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각국의 불교전파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중국의 변용된 불교가 전해지기보다는 인도에서의 불교가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불교전래 설화 가운데에는 ‘금인(金人)’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불상 전래설이 있다. 이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중국 불교 초기에 나타나는 건무 4년(338) 금동불좌상, 감숙성 출토 금동불좌상(4~5세기경) 등 불탑보다는 불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역시 고구려 요동성 육왕탑 전설을 제외하면 대부분 불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탑과 불상의 비중문제이기 보다는 전파 발원지의 문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증거자료로 활동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경우 대부분 서북인도로부터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왔으며, 그 시기 역시 불상이 출현하는 시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불상이 주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불탑의 경우 운반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소형 불상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경우, 불탑이 들어왔다는 전설은 불상보다는 불탑의 비중이 훨씬 높은 인도 중앙 혹은 남부지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불상 출현 시기가 일반적으로 대승불교 흥기 시점과 맞물린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가야의 불탑 전파 전설은 기원전후로 흥기한 대승불교보다는 초기불교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불교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고대 교류 속의 가야

본고에서는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해상교역을 통해 인도, 중국에 이르고 있었음을 밝혀보았다. 그 속에서 쌍어문의 등장과 신화적 내용의 전파문제도 함께 다루어보았다.

그리고 일방적인 전파가 중국까지 이르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가야의 선진화된 철기문화는 역으로 중국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양상 속에서 인도 혹은 중국 보주에 머물던 허황옥이 해상로를 통해 가야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제시해보았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신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물고기와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잉어와 쌍칼은 각기 쌍어문의 신화적 효시와 철기보급과 물고기 신화의 결합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가야의 철기보급력과 선진화된 철기문화의 흡수를 위한 동서의 해상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고, 가야는 당시 해상루트의 동단으로써 그 역할을 다 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허황후를 통한 자연스러운 불교전파가 이루어지는데, 한국불교 시작에 있어 사상·정치·외교적 특수성을 배제한 민족 간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진 불교전파라는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불교가 중국을 통해 전해지는 경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의 사상 및 문화가 습합된 불교를 수용했던 것에 비해 가야의 경우에는 이러한 경향성을 최대한 배제시킨 상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불교의 시발점은 가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가야와 관련한 국가성립 설화, 허황후와의 결합, 불교의 수용 등의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의 진위여부를 밝히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 설화가 등장하였는지, 허황후와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교 수용 과정이 어떤 특수성을 갖는가라는 점을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대 국가 성립과 관련된 전설은 각 국가마다 지니고 있다. 설화 혹은 전설이 갖는 상징성과 의미를 찾고,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 등을 조명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갖고 있는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설득력을 지닌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해상교역 루트 상에서 당시 가야의 위상과 더불어 한국불교에서 가야불교의 시작이 갖는 의미를 밝혀보았다.    
 
'고대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과 의미'에 대한 토론문

서영교 교수(중원대)


발표자는 “본고에서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해상교역 루트 상에서 당시 가야의 위상과 더불어 한국불교에서 가야불교의 시작이 갖는 의미를 밝혀보았다.”고 했다. 

발표자는 가락국기에 보이는 국가성립, 허황후, 불교 수용은 그 진위여부를 밝히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왜 그러한 설화가 등장하였는지, 허황후와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초기불교 ‘씨앗’의 한반도 유입이 어떤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조명하고자 했다.

발표자는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해상교역을 통해 인도, 중국에 이르고 있었을 소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쌍어문의 등장과 신화적 내용의 해상 전파문제를 다루었다. 나아가 가야의 선진화된 철기문화는 역으로 중국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양상 속에서 인도 혹은 중국 보주에 머물던 허황옥이 해상로를 통해 가야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제시해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불교전파가 이루어지는데, 한국 내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불교의 시발점은 가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시대이전에도 광대한 범위의 해상교역은 존재했고, 많은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있다.

1. 과연 가야의 철기문화가 중국․인도보다 선진적이었나?
 
양자강 상류인 四川省에서 하류로 거슬러 내려가 해상교역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나, 가야의 첨단 철기기술이 그 탐험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수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어떤가?

2. 가야에 불교가 전파되어 뿌리를 내렸나?

초기 불교 씨앗은 떨어지지만 발아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발아되었다 해도 제거될 수도 있지 않은가. 동서해양교역 속에 수많은 문화가 ‘浮游’했다. 문화의 定着과 浮游를 구분하는 것이 어떠한가? 浮游로 본다면 초기불교의 가야도착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고증’으로 콘텐츠를 역사의 어둠속으로 밀어 넣자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콘텐츠를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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