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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사 장유화상 수행처! 조계종 장유사(長遊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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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사 장유화상 수행처! 조계종 장유사(長遊寺)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4.02.21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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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사 장유화상 수행처! 대한불교조계종
장유 불모산 용지봉 자락에 고즈넉한 자태 뽐내
장유신도시가 발 아래 한낱 점으로 보일락 말락
장유화상사리탑 불법 인연 오랜 세월 묵묵히 한자리에


장유사(長遊寺)는 김해 불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남도 전통 사찰 제20호로 지정된 대한조계종 제17교구 범어사 말사다. 그 옛날 가락국 당시 최초의 절인 왕후사 터인 이 곳에 6.25때 불타 없어진 절을 화엄선사께서 중창불사하여 지금까지 사부대중과 불자의 마음수양 장소로 널리 알려져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이름난 도량이다.

불모산(801m)은 김해시 장유동과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과 경계를 이루며 정상은 용지봉(723m,용제봉이라고도 부름)이라 부른다. 정상부위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는 진해앞바다 수평선과 왼쪽으로는 장유신도시(옛 김해바다)가 시원스레 발아래 펼쳐진다.신 년 해맞이 장소로 유명해 새해 첫 날이면 장유시민들로 가득찬다.

   
 
  장유화상사리탑 옆에서 보면 차례로 대웅전, 절마당, 요사체 행선실 삼성각이 한 눈에 보인다.  
 

상상하건데 그 옛날 하늘의 계시를 받은 가야인들도 여기 용지봉에 올라서 저멀리 태평양을 건너 김해바다로 들어오고 있는 피부색이 다른 한무리의 인도인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고려 초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이 부분에 대해 너무나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누구도 이설을 다는 이는 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얽힌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이만 오천 리의 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가락국 창건주 김수로왕(158세)의 아내이자 국모로,  2대 거등왕의 모후로, 일곱왕자의 불모로,속세 나이 무려 157세로 살다간 허황후는 분명히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고 그의 오빠 장유화상 보옥선사 역시 머나먼 인도로부터 이땅에 부처님 불법을 전하기 위해 동행하여 몸소 헌신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곳에 왕후사(장유사)를 짓고 자신들이 건너온 초발심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 절 아래 훤이 펼쳐진 김해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네 중생의 업장을 빌고 또 빌었으리라.

   
 
  ▲ 장유화상사리탑(문화재자료 제31호).  
 

장유사(長遊寺)는 소규모 전통가람으로 장유암(長遊庵)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대웅전 뒤편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계단으로 올라가면 팔각사리탑 1기가 나온다. 15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절의 가장 오래된 그 유명한 장유화상사리탑(문화재 자료 31호)이다. 이 탑은 허황후의 오빠이자 김수로왕의 처남인 황보옥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되어 보존되고 있다. 축적연대는 A.D 5세기(451~492)경 가락국 8대 질지왕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탑은 주위의 장유화상기적비와 두 개의 비석과 한 곳에 있으며 높이 224cm로 팔각기단위 연화모양의 대위에 세워져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체무게감이 묻어난다. 사찰의 모든 다른 건물은 불에 타고 외부의 침입에 의해 파손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사리탑만은 현존하여 절의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채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 마음 속의 부처님처럼.

대웅전 앞 넓은 절마당에서 남동쪽방향 아래로 쳐다보면 그 옛날 김해만의 바다위에 지금은 수많은 아파트군락들이 마치 성냥각처럼 세워져 옹기종기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모양새다.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점보다 작아 아예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우리 인간들을 부처님 손바닥안에 놀고 있다고 하는 것일까? 어쨌든 인간은 반드시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고 억만 겁이 지난 뒤에 다시 바람에 날리는 먼지로 환생하여 이 지구상이나 우주공간으로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낭만여행을 하지 않을까! 장유화상 보옥선사처럼.

   
 
  ▲ 장유사 입구 비석군.  
 

절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우협시불을 모신 대웅전, 장유화상불중탱이 있는 삼성각, 절 입구로 들어서는 일주문과 그 위에 건축된 범종각, 요사채 등으로 꾸며져 있다. 해마다 국가에서 전통사찰 보존을 위한 지원금이 내려와 중수를 하고 있어 관광객이나 일반인들에게 조금은 옛스러운 절맛은 덜하지만 후세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생각한다.

장유사를 찾아가려면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장유IC에서 창원 쪽으로 가다 창원터널 입구의 폭포진입로를 이용 1km 정도 산길로 올라가다 보면 절이 보인다. 또는 대청IC를 지나 우회전 하면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대청천을 만난다. 계곡을 따라 개설된 도로를 따라 오르면 장유폭포에 다다르고, 여기에서 4㎞ 정도 더 가면 장유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택시)를 이용하려면 장유시내까지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주소 김해시 대청계곡길 170-563(대청동) 전화☎ 055)336-2328

 

   
 
  ▲ 금동반가좌불상(용지봉 입구).  
 

[고려 문종(文宗) 때인 대강(大康) 연간(서기 1075~1084)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이 지은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에 나타난 허황후 신행길에 대해 간략하게 싣는다.]

건무(建武) 24년 무신(서기 48) 7월 29일, 구간들이 조회할 때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까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청하옵건대,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내 배필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이고 짐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하늘의 명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곧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다시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서 승점(乘岾)[망산도는 수도 남쪽 섬이다. 승점은 수도 아래에 있는 속국이다.]에 가도록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올리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자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 궁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구간들을 보내어 목란으로 만든 키를 바로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얼른 궁궐로 모시려고 하자, 왕후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들을 평소에 몰랐는데, 어찌 경솔히 따라갈 수 있겠소.”

그래서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후의 말을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고 여기고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행차하였다. 궁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 정도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궐로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산 위에서 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예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밖에 따라온 신하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었고 이들의 아내는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고 하였다. 또 종까지 헤아리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가져온 수놓은 비단과 옷과 옷감, 금과 은, 주옥과 옥 등의 장신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후가 왕의 임시 궁궐로 점점 다가오자, 왕이 나가서 맞아들여 함께 장막으로 만든 궁궐로 들어갔다. 왕후를 따라온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계단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님을 뵙고는 곧장 물러났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신하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 주어 편히 머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방 하나에 5~6명씩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잘 수 있도록 하라. 의복과 비단과 금은보화 등은 군사들을 모아서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왕과 왕비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께서 황후와 함께 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나라의 상제님을 뵈었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시조 수로를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았으니, 신령스럽고 거룩한 이는 오직 그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로 삼아라.’라고 하시고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눈을 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여전히 귀에 있는 듯하구나. 너는 여기서 얼른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 저 멀리와 하늘 저 멀리까지 당신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짐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서, 공주가 저 멀리서부터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고 청하였지만 감히 따르지 않았소. 지금에서야 현숙한 분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맑은 밤을 두 번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다. 뱃사공들은 모두 15명이었는데,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8월 1일에 대궐로 돌아왔는데, 왕은 왕비와 함께 수레를 탔고 왕후를 따라온 신하의 부부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왔으니, 물시계가 정오에 가까웠을 때였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였고 신하 부부와 노비들도 빈 집 두 채에 나누어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밖의 종자들은 20여 칸 되는 집 한 채를 주고 인원 수에 따라 나누어 있게 하였으며, 날마다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주었다. 그들이 가져온 보물은 대궐의 창고에 보관하고 왕후의 사계절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 절 입구에 있는 기도처.  
 
   
 
  ▲ 대웅전 용마루에서 바라본 장유신도시, 명지동, 다대포, 남해앞바다.  
 
   
 
  ▲ 절 입구 일주문(대북과 범종).  
 
   
 
  ▲ 대웅전 법당.  
 
   
 
  ▲ 장유사 대웅전.  
 
   
 
  ▲ 행선실.  
 
   
 
  ▲ 넓은 절마당이 특이하다.  
 
   
 
  ▲ 장유사 입구.  
 
   
 
  ▲ 장유사 연혁과 법회 안내 표지판.  
 
   
 
  ▲ 장유신도시가 산 아래 성냥각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 장유사 입구의 장유폭포 물레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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