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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5>“50만 김해 - 근대50년” 50년 곡창지역 김해평야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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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 <5>“50만 김해 - 근대50년” 50년 곡창지역 김해평야가 사라졌다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11.01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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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곡창지역 김해평야가 사라졌다.(부산에 편입된 대저읍, 명지. 녹산.가락면)

   
 
  ▲ 부산광역시 북구 백양산에서 바라본 낙동강 구포대교와 부산 강서구 대저동 일원(구. 김해군 대저읍)  
 

김해평야 [ 金海平野 ]의 유형과 지명
낙동강 하류에 삼각주로 발달된 충적평야(沖積平野). 낙동강은 양산협곡을 벗어나면서 동·서의 2대 분류(分流)로 갈라지는데, 김해평야는 대체로 이곳에서부터 남해에 면한 명지동까지 계속된다.

동서의 너비는 김해 시가지의 바로 남쪽에서는 약 12㎞에 이르지만 하류에서는 약 6㎞로 좁아지며, 남북의 길이는 약 20㎞, 면적은 약 130㎢이다.

김해평야는 거의 전부가 현재의 낙동강 서쪽과 서 낙동강 사이에 발달되어 있다. 낙동강 서쪽의 넓은 삼각주가 원래 김해의 땅이었다.

1977부터 일기 시작한 김해군 김해읍 시 승격문제로 김해군 유지들과 김해읍 유지들이 이견을 보이며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던 틈을 노린 부산시가 1978년 2월 15일 김해군 대저읍,명지면 서 낙동강 동부지역을 등을 부산시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때 김해공항과 공군비행장도 자연스레 부산시로 넘어갔다.

   
 
  ▲ 김해~부산간 연결 도로였던 구. 구포대교 모습.  
 

이후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었지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초라하기는 김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3년 전에 군 살림살이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곡창지역 김해평야를 몽땅 부산시에 빼앗긴 상태에다 김해읍 까지 시로 승격해 버렸기에 김해군의 재정과 군세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81년 김해읍이 시로 승격 된지 8년 만인 1989년 1월 1일 또다시 김해군 가락면, 녹산면 전부가 부산시 강서구에 편입되어 버렸다.

   
 
  ▲ 한 많은 구포대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철거).  
 

그나마 이전 까지 가락과 녹산 들판에서 볼 수 있었던 김해평야 황금 들녘은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김해평야는 우리나라의 주요 곡창지대의 하나이며, 비닐하우스 농사의 본고장으로서 토마토·딸기·오이·배추·꽃 등의 재배가 매우 활발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업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며, 금세기에 들어와서도 오랫동안 김해평야는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 김해 평야의 진원지인 녹산 들녁이 산업단지 조성으로 사라졌다.  
 

부분적으로 농토로 이용되던 곳도 있었으나 홍수의 피해가 잦았으며 갈대밭의 저습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16년에 대저 수리조합이 설립되고, 1932년에 대저제방(大渚堤防)이 완공되는 등 수리시설이 갖추어지면서부터 이 지역은 쌀의 곡창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대저제방은 낙동강의 서쪽 분류인 죽림강(竹林江) 입구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김해평야 남단의 명호도(鳴湖島)까지 거의 곧바로 계속된 다음, 서쪽으로 꺾여 죽림강 하구의 노적봉 부근에서 끝나는데, 전체 길이가 약 32㎞에 달한다. 대저제방의 축조로 인하여 이때부터 낙동강은 동쪽의 본류로만 흐르게 되었다.

   
 
  ▲ 부산 강서구 명지동 들녁에서 농부들이 대파를 수확하고 있다. (2011년 11월 1일)  
 

제방 안에 갇힌 구하도(舊河道)들은 지금도 뱃길로는 이용되고 있으나, 하천의 기능은 잃어버렸다. 죽림강 입구의 제방에는 취수문과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어서 구하도와 낙동강의 수면에 차이가 있을 때도 배가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구하도의 풍부한 물은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따라서 관개수로가 질서정연하게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는 김해평야에서는 가뭄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드물다. 대저제방은 홍수의 피해를 줄이는 한편, 염수(鹽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 죽림강 하구의 수문은 배수문의 구실과 아울러 염수의 침입을 막는 구실을 한다.
낙동강은 2대 분류에서 다시 일련의 작은 분류가 갈라져 나가고, 이들 분류의 사이에는 많은 하중도(河中島)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들 하중도는 김해평야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요한 하중도로서는 상류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저도(大渚島)·덕도도(德道島)·유두도(柳斗島)·둔치도(屯致島)·수봉도(水峰島)·맥도(麥島)·일웅도(日雄島)·을숙도(乙淑島) 등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김해평야의 자리에 큰 만(만)과 몇 개의 작은 섬만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술 내용과 일치한다.

   
 
  ▲ 부산시 가락동 오봉산에서 바라본 가락들녁 수확을 앞둔 벼가 황금바다로 이루고 있다.  
 

그리운 김해평야 추억의 낙동강 둑길

1970년대까지 김해평야는 김해군과 부산 북구지역을 포괄하여 동서 너비 6~12㎞, 남북 길이 약 20㎞, 전체 면적이 1만3000여 ha였다. 그러나 2006년 기준 강서에 5450여 ha, 김해에 1500여 ha가량이 남아 전체적으로 약 50%가 사라졌다.

36년간 개발제한에 묶여 있던 이곳 농민들은 '먹고 사느라' 가진 농토를 팔아먹고 70% 이상이 임차 농으로 전락했다. 부산 강서구의 농민 6155호 2만2000여 명(2006년 기준) 가운데 1만7600여 명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 30년전 김해읍 중심지가 지금도 별로 발전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이 임차 농인 강서지역 농민들의 또 다른 불안은 부산시의 대대적인 강서 개발 계획. 이른바 '강서 첨단(운하) 물류산업도시' 안이 그것인데, 그린벨트가 풀려 개발이 현실화될 경우 강서구의 가락·강동·녹산동의 농지 약 4950만 ㎡(약 1500만 평·4950㏊)가 사라진다. 여기에 이미 입안된 대저동의 강서신도시 부지 490만9000㎡(약 148만 평)까지 더해지면 강서의 김해평야는 사실상 이름만 남는다.

강서구 주민들이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개발반대 투쟁을 벌이자 결국 토지공사와 부산시 도시개발공사가 사업을 포기 했다.

   
 
  ▲ 강서구 가락동 오봉산에서 바라본 서낙동강 삼각지.  
 

김해의 관문이자 경상남도의 관문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던 구포대교도 사라지고 신 대교가 건설 되었지만 그래도 김해사람들은 김해와 부산시의 경계에 있던 구포대교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다.

대저읍 배 밭은 부산과 김해의 처녀 총각의 데이트코스로 유명했다.

달고 단 배를 사 먹고는 연인과 손잡고 낙동강 둑길을 한참을 걸어 사랑을 쌓고서는 대동면 안막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제2막 뱃놀이가 시작된다.

   
 
  ▲ 싱싱한 해물들을 실어 나르던 녹산 선창가.  
 

시골할아버지가 노 저어주는 나룻배에 올라 출렁이는 물결 때문에 그 작은 나룻배가 좌우로 흔들거리며 스르르 흘러가는 동안 주변의 풍경도 멋있었지만, 아찔한 나룻배 덕분에 팔짱을 꼭 끼며 매달리던 그때 그 아가씨의 분내음을 기억하는 분들이 사라진 김해 땅 그 배 밭과 나룻배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침밥은 김해서 먹고 똥은 부산서 싼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해사람들은 부산으로 편입된 김해평야에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부산과 김해의 경계지역이었던 낙동강을 중심으로 구포 둑과 대저 둑의 쟁탈전도 만만찮게 일어났다.

구포 둑에 늘어선 수없는 포장마차에서 강바람과 함께 간단하게 한 한 젊은이들이 구포다리를 걸어서 대저 둑까지 와서 데이트를 했다.

   
 
  ▲ 낙동강 1300리길을 달려온 물결이 서낙동강을 통해 바다와 만나고 있다. (녹산 수문)  
 

김해군 대저읍 지역인 이 둑은 구포 둑에 비해 어두침침하여 남녀 간 사랑을 나누기에는 최상의 코스였다.

잘 자란 잔디와 갈대숲 사이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야릇한 신음소리는 그곳에 있는 또 다른 데이트 족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해 총각들은 부산놈들이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치고서는 싸움박질까지 했다.

부산놈들도 역시나 김해촌놈들이 구포 둑으로 와서 포장마차 촌을 누비는 것을 차단하거나 시비를 걸어 쫓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 때문에 구포역 주변 버스정류장은 수시로 구포깡패와 김해깡패들의 싸움장이 되곤 했다.

언젠가 서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 오늘날 김해의 크고 작은 유흥주점을 부산 건달들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하와이라고 불리고 있는 김해 건달들과 부산 건달들의 철칙이 하나 있다면 절대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형나이트 클럽과 볼링장 등의 지배인 등은 서로 돌아가면서 근무한다든지 구역을 나누어 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상호협력하여 관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그리운 김해평야

대저 배, 명지 대파, 녹산 해물 등은 김해를 대표하고 전국에 잘 알려진 특산물이었다.
김해읍에서 재배하던 김해 미나리와 함께 대저 배와 명지의 대파 대부분 서울 농수산물시장의 인기 단골이 되기도 했다.

녹산 수문 주변의 횟집과 해산물 가게들도 싱싱한 해물을 구하기 위해 부산 김해 등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붐볐다.

소형어선들의 항구이기도 했던 녹산 바닷가는 어부들이 갓 잡아온 살아 있는 생선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보니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 낙동강에서 흘러 들어오는 민물과 태평양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어종이 참 많았다.

김해군 체육대회마다 명지면 어린아이들이 씨름판에서 김해의 어른을 다양한 기술로 모래판에 처박아 관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박기도 했던 명지 대파 씨름꾼들도 78년 이후부터는 볼 수가 없었다.

녹산 신호리의 바닷물이 밀려나간 바닷길 갯벌을 걸으며 조개, 소라, 고동을 줍던 낭만도, 생선, 어패류, 해산물 등 새벽 경매로 유명했던 용원도 점점 김해와 멀어져만 갔다.

가락과 녹산 서 낙동강 주변에서 성업을 했던 메기매운탕 집, 장어구이집, 붕어찜. 잉어찜, 매운탕, 추어탕 집들도 서 낙동강의 오염과 주변의 공업화로 점차 사라져 옛 김해평야시절의 맛과 멋들어진 풍경을 느낄 수가 없다.

김해평야의 농민들의 정답고 인정 넘치던 그때 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이제 내 집 앞 주차문제부터 오수 화수 도로 문제 까지 사사건건 시시비비하고 있는 삭막한 대도시 사람들로 변해 가고 있다. 한마디로 너그럽고 풍요로 왔던 김해평야의 정기와 흙 내음을 모두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깊어 가면 여름 내내 장마와 태풍을 이겨낸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황금 들녘. 추수를 해서 아이들 학비, 추석 때때옷, 맛있는 반찬을 마련할 수 있는 귀한 쌀을 이곳 황금 들녘에서 얻었지만 지금은 없다.

우리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참새를 쫓으려 하루에도 몇 번은 논두렁에 가서 훠이훠이 장대를 두드리던 김해평야!

아버지 곁에서 메뚜기를 잡아 병에 담아서 구워먹기도 했고 벼가 익어가는 논 언덕 밑 물기가 촉촉한 곳을 괭이로 파면 미꾸라지가 나오기도 했다.

미꾸라지를 잡아서 오는 길옆 오래된 작은 도랑에는 뜰채로 몇 번만 더듬어도 민물 새우가 수두룩하게 올라오기도 했다.

우리네 어린 시절은 그렇게 행복한 날들의 파노라마였지만 이제 그 논이 없어졌다. 메뚜기와 논 고동, 미꾸라지는 다 어디로 갔는지, 작은 도랑에 살던 새우와 붕어 메기도 세월 따라 김해평야와 함께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어린 시절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김해평야 황금 들녘에서의 추억들이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다.

아쉽고 그리운 옛 김해 땅, 김해평야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지나간 세월과 바뀌어 버린 환경은 어쩔 수가 없다.

요즘 인구 50만이 된 김해시의 30만 유입시민들은 부산시 강서구 대저, 명지, 녹산, 가락동 등이 옛 김해 땅이었고 이곳이 김해평야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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