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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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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09.08.06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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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님께서 14살에 창녕 조가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시집 올 때는 신랑 집이 제법 잘살고 신랑도 잘생겼다는 외할아버지의 말씀만 믿고 무조건 시집을 왔다고 하셨다.

시집 온지 약6개월쯤 되던 어느 날 한 달 간격으로 한명씩 어린아이부터 어머님 보다 나이가 많은 딸까지 총 6명의 자식들을 줄줄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총각인줄 알고 시집온 어머님, 그것도 14살의 어린 나이에 당한 기막힌 현실을 어머님은 격어야 했다고 한다.

상처한 남편의 전 부인이 나은 6명의 친구 같고 형제 같은 자식들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돌보았지만 그 중 2명은 질병으로 운명하고 딸 둘 , 아들 둘은 건강하게 잘 성장시켰다고 했다.

그렇게 창녕 조가 집안으로 시집와서 19년이 되던 해, 어머니 나이 33세에 나를 낳았다고 한다.

시골 산골의 절이란 절을 다 다니면서 기도  끝에 얻은  귀한 자식 이엇것만 백일기침에 걸려 낳지 않자 함안 백산의 야시아지매라는 무당(무속인)집에 버리다 시피 맡겨 놓았다고 했다.

모진 게 생명이라고 나는 죽지 않고 새록새록 자라기 시작하자 어머님께서는  다시  나를 데리고 가서는 키웠다고 했다.

어머님은 당시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시장 입구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였고 거기서 나는 5살까지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너무나도 추웠던 겨울 어느 날,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머님과 우리는 길거리로 쫓겨났다.
마을 사람들이 임시로 마련해준 집에서 얼마간을 생활하던 어머님은  미친 듯이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행방불명 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바가지를 들고 1년여 동안 동냥을 하며 생활을 했다.

한때는 삼성그룹 이병철씨 재실에서 자기도 했고 추운 겨울철에는 논 가운데 세워둔 볏짚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속에서 서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부락의 부잣집에 꼬마머슴으로 들어가 큰 머슴 사이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남들 다 다니는 학교는 구경도 하지 못했고 함안군 법수면에 있는 외갓집에서 나를 데려가 조금은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찾아온 배다른 작은 형님의 손에 끌려 외갓집을 나와 전국으로 끌려 다니기도 했고, 이곳저곳에 나를 맡겨 놓고 돈을 빌려가거나 술을 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노예 아닌 노예 생활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객지생활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전라도 순천. 대구, 울산, 부산, 마산, 진해, 함안. 서울, 김해를 끝으로 구두닦이. 넝마주이. 서울, 종로 제2직업 안내소. 용호호텔. 야간요정. 한국배우 전문학원. 신촌나이트클럽. 한식당 .우유 배달. 갈비전문집. 다방 주방 보조. 보신탕집 주방보조. 철공소. 부산 기찰 자동차 타이어 빵구집. 부산동래 브라더미싱공장. 신세기 와이셔츠 공장. 금강원 입구 막걸리 도매집 배달. 국제상사 제5사업부. 영도. 광복동 자전거점원. 만화방. 세탁소. 양복점. 오토바이점.삼부주유소뒤편포장마차.전자제품 판매원.김해중 후문에서 풀빵장사.용접공.도배.건축보조. 중화요리배달.해장국집 등 10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배우지 못한 이유 때문에 글과는 먼 직업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만큼 고생도 남들보다 배가 되었다.

어린 시절 못먹고 못배우고 못살았던 추억과 어머님의 기막힌 한을 , 아니 19년 동안 기도하면서 나를 나은 그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자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나 자신의 능력껏 어려운 사람들 특히 밥을 굶거나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평생을 몸바쳐 왔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힘없고 돈없는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권력자들의 위법행위를 고발하여 62명을 구속시키기도 했고 벌금을 물게 한 사실도 있다.

김해시 내외동 58만평 신도시 개발 사토매립의 총 책임자로 선임되어 약 4년 동안 폐기물 반입을 감시 단속 하면서 폐기물 업자와 부산 지하철 공사 업자들로부터 수억원에서 십억대의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조직 깡패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았고 실제로 실행 전 모 기자 때문에 중간에 나를 해하려고 했던 계획은 중단 되었지만 그들과 싸우느라 폭력 전과만 한참 늘었다.

어떻게 하든 정당하게 사업을 하여 돈을 벌어 불우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무인경비회사 하나로 캅을 설립하여 8년여 동안 죽을 고생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이제 조금 수입이 일어나기에 지역의 사회 환원사업차원과 시민문화 창달에 기여 하자는 뜻으로 영남매일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2년여 동안 무료로 배부 해 왔고, 어느 누구에게도 광고 한번 부탁 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데도 일부 정신 나간 김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여자도 많고 숨겨놓은 자식들도 많다고 하면서 이번에 수억원을 갈취하여 구속 되었다. 그래서 한 4~5년 징역을 살 것 이라고 기관장들과 시의원들 상공단체 간부들 그리고 김해에서 조금이라도 특혜를 받고 있는 내 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나를 폄하 하고 모함하면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다.

오늘 공개된 이 지면에서 공개적으로 물어 본다. 어는 누구든 신문사나 이권과 관련 아니 어떤 면목이던 부정한 돈을 나에게 주었거나 주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 글 아래 댓글을 달아 주길 바란다.

나를 사기꾼이라고 한다는데 나에게 어떤 사기를 당하였는지 혹시 사기당한 사람이 있는지 아니며 사기당한 사람으로부터 사연을 들었다면 그 내용도 담아 주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숨겨놓은 자식이 많다고 했는데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밝혀 주길 바란다. 집 없고 길잃은 아이들을 경찰이 데려다 주어 6~7명을 우리 집에서 길게는 1년여 동안 키우기는 했지만 숨겨놓은 자식은 없다.

그리고 동종의 전과가 많고 징역도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김해 내외동 시외버스 터미널 이전 시민대책위원장을 맡아 버스 터미널을 옮긴 후 사용한 경비 문제로 구속되었다가 특별 사면과 동시 복권까지 받은 사실은 있지만 파렴치범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실은 없다.

돈 있는 사람들이 돈으로 권력을 움직여 기득권을 유지해 오면서 김해를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른 소리 잘하고 타협 없는 나 같은 객지 놈이 신문과 인터넷 방송까지 하고 있으니 눈에 가시겠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남의 말이라고 함부로 휘둘러 되는 유언비어 때문에 정말이지 죽고 싶을 지경이다. 단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가 살아온 과정 나의 어머님의 삶까지 언급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밉고 원망스럽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다. 모든 원인은 나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자식들이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기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을 하다가 오늘 이렇게 나의심정을 담아 공개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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