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일본 제국주의 독도 침탈사
일, 1905년 러 발틱함대와 해전 승리 위해 불법편입
영유권 분쟁은 특성상 식민지배 처리과정이나 전쟁 후 점령지의 처리과정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주로 역사적 근원이 주요한 쟁점이 되기 마련이고 이는 결국 역사논쟁과도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다.
동북아 지역 내 영토문제 역시 식민지역사 또는 제국주의 침탈사와 무관하지 않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러·일 간 북방도서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정에서, 중·일 간 센카쿠(조어도) 도서 영유권문제는 청일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일본의 영유권 도전이 제기되고 있는 독도 역시 러일전쟁 과정에서 초래된 침탈사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일제의 침략사와 러일전쟁사
독도문제의 본질은 바로 일제의 침략사 및 러일전쟁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 1904년 8월 22일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시작되는 일제의 한국침략 와중인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소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우리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편입조치하게 된다.
이어 1905년 11월 7일에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을 거쳐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에 이르면서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도 침탈이 기정사실화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의거 일본은 한반도에 일본군을 주둔시키면서 군용지를 마음대로 수용·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어 반년 뒤인 1904년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정서를 체결해 일본은 스티븐스 외교고문 및 메가다 다네타로 재정고문을 임명하는 등 조선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사실상 박탈한 셈이었다.
1904년 8월경까지 조선에 대한 군용지 사용권한과 외교권 및 재정권을 확보한 일본은 같은 해 9월부터 11월에 걸쳐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본격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 설치 및 이를 위한 현지조사 등을 실시하였다.
1904년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이듬해 시마네현 고시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독도 침탈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으나, 불과 몇 달 뒤인 5월경만 해도 일본 해군은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할 정도로 러시아 발틱함대에 비해 열세였다.
이를 극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일본군은 9월 1일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감시망루를 각각 설치하였고, 이어 9월 24일에는 일본군함 ‘니타카’호가 독도망루 설치를 위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5일 뒤인 1904년 9월 29일에 일본의 어업가인 나카이 요사부로가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당초 그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일본 정부를 통해 ‘독도 임대청원서’를 제출하려던 참이었으나 당시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쓰케 가네유키 등의 사주를 받아 결국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케 되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1일에는 일본군이 여순을 함락시킴에 따라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최종 결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 1월 10일 내무대신(요시카와 아키마사)은 총리대신(가쓰라 다로)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 개최를 요청했으며, 불과 2주일여 지난 1월 28일 일본 내각은 전격적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했고 뒤이어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침탈을 완료한 셈이다.
“주인이 없는 빈 집에 들어가 귀중품을 들고 나오는 것”
따라서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조치는 러일전쟁 중인 한반도 강점기에 이뤄졌으며 당시 무주지가 아닌 한국의 영유권에 대해 행해진 불법, 무효한 조치이다.
1905년의 불법 편입조치에 대해 일본은 처음에는 ‘무주지 선점’이라고 주장했다가 추후에는 ‘일본의 고유영토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번복하는 등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고유의 영토라고 하면서 1905년에 편입시켰다고 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며 자국의 영토에 대해서 영유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국제법상 근거도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해서는 일본의 소수 양심적 학자들도 이미 인정한 바 있다. 일본의 나이토 세이츄 시마네 현립대학교 명예교수는 “주인이 없는 빈 집에 들어가 귀중품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비유했고, 호리 가즈오 교토대학교 교수 역시 “(당시 한국은) 나라 전체를 빼앗겨 소멸된 지경인 가운데 하나의 바위섬인 영유문제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기술할 정도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의 독도침탈사를 일제의 한반도 침략사 및 러일전쟁사의 맥락에서 연표로 도식화하여 재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이와 같은 일본의 대한반도 침탈 양상은 동해 바다의 명칭이 그간 국제사회에서 ‘일본해’로 그릇 알려지게 된 배경에서도 잘 나타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인 1929년에 국제수로기구(IHO)는 세계 각국의 해로 안전 등을 위해 ‘해양과 바다의 경계(S-23)’ 초판을 발간했는데, 당시 일본에게 주권을 침탈당한 한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바다의 명칭이 ‘동해’ 대신 ‘일본해’로 표기됐고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회에 잘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즉, 일본의 침탈로 인한 또 다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쿠바의 ‘후벤투드’ 도서영유권의 귀중한 사례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조치가 자행되던 1905년과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오히려 식민국가가 스스로 피식민국의 영유권을 인정해 주면서 되돌려 준 귀한 사례가 있어 국제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미국과 쿠바의 ‘후벤투드’ 도서영유권 사례이다.
1898년 스페인의 통치권이 미국에게 양도된 이후 1902년까지 미국의 군사적 관할권 아래 있던 쿠바는 1902년 ‘플라트 수정안'(Platt Amendment)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그러나 ‘플라트 수정안’은 후벤투드 섬의 사항은 쿠바 독립국의 법적 영토 경계에 포함된다고 규정할 수 없으며 이는 차후 협정에 의해 조정될 것 이라고 밝혔다.
1904년 미국의 해이(John Hay)와 쿠바 측 쿠에사다(Gonzalo de Quesada)는 후벤투드 섬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쳐 해이-쿠에사다 협정(Hay-Quesada Agreement)을 맺게 된다.
이 협정에서 쿠바 측의 주장은 상당부분 인정되었고 미국이 1898년 파리조약 I항과 II항의 효력에 의해 행사할 수 있는 후벤투드 섬에 대한 권한을 포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식민침탈로 인한 영토분쟁 사례 광범위하게 추출해야
서양에서 미국이 피식민국 쿠바의 도서영유권을 인정해주면서 협정까지 맺게 된 1904년 그 즈음 동양에서는 정반대로 1905년에 식민국 일본이 피식민국 한국을 침탈하면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불법 편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식민침탈사로 초래된 영토문제의 바람직한 해법은 바로 침탈한 국가의 반성과 결단에 있으며, 이것이 21세기 지구촌의 보편적 해결모형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식민침탈로 인한 세계의 영토분쟁 사례들을 광범위하게 추출해내는 작업부터 선행할 필요가 있다.
[주] 러일전쟁 당시 일본 군부의 독도침탈사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일본 군부의 독도침탈사’(바른역사정립기획단, 2006) 및 ‘일본은 이렇게 독도를 침탈했다’(바른역사정립기획단, 2006.7.7 / 동북아역사재단, 2007.4.15) 참고.
배진수 동북아역사재단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