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지나 구지봉 사잇길로 들어서니 솔바람 소리에 콧노래가 절로 난다, 구지봉은 수로왕의 탄강설화가 있는 곳이다. 우우 줄지어 선붉은 소나무, 배롱나무들이 사열을 하며 땀흘리며 올라오는 일행을 반긴다.
구지봉은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 구봉 등으로 불린다.<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탄강설화인<구지가>가 실려 있다.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아홉구간들이 구지봉에 모여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는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다.
상자에서 나온 여섯 개의 황금알은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소가야 등과 함께 6가야의 시조가 되었다. 구지봉을 알리는 고인돌의 상석에 ‘龜旨峯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직접 썼다고 전한다.
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이미 수로왕 탄강 이전부터 거북의 머리위에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간 우리를 닮은 가야의 돌무덤, 그 속에 이제는 흙으로 바람으로 숨 쉬고 있는 가야인, 고인돌은 역사가 되어 묵묵히 구지봉 언덕을 지키고 있다. 구지봉은 가야의 시원으로 국문학사적 첫 고대가요<구지가>의 탄생지이다.
구지봉을 알리는 입구의 표지석에는 구지가의 원문이 새겨져 있다. 부산지역의 낯익은 교수님들을 비롯해 전국의 국문학자들이 기금을 모아 세워진 안내 표지석이다.
우리 김해지역 국문학자들의 이름이 빠진 것이 사뭇 아쉽다. 십여 년 전 은하사 산책로 ‘시의 숲’이 조성되었다. 김해지역문인들의 시를 돌에 새겨 숲을 찾는 이들에게 정서적 휴식과 시심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돌에 글을 새긴다는 것은 어쩌면 후대에 이름을 알리고자하는 내면적 욕망의 표출일 수도 있지만 후손들에게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의 삶을 입증할 수 있음을 표지석과 고인돌을 보며 미루어 생각한다.
천년을 아우르는 고대 유럽문화, 고성의 조각들, 로마수도교를 비롯해서 돌로 지은 거슬은 오랜 역사가 흘러도 변함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 세상 사람들을 불러 관광자원으로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구지석이 품고 있는 김수로왕 탄강설화는 다양한 스토리로 각색되어 후손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푸른 소나무 곁에 누워 잇는 구지봉석, 고인돌의 이야기도 수로왕의 설화와 더불어 오래 기억되길 염원한다.
현재 구지석이 있는 이곳에 한때 대리석으로 수로왕 탄강을 상징하는 여섯 개의 앙 조형물이 이었다. 혹자는 수로왕 탄강설화에 대한 상상력을 고착시킨다고 없애버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왕릉공원 연못 한쪽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구지봉석과 고인돌, 붉은 소나무들만이 옛 가야의 시원지를 지키고 있다.
구지봉 붉은 소나무 길을 걸어 허왕후릉과 이어지는 산책로에 선다. 거북의 몸체가 천문대와 해은사를 품고 있는 분산 쪽이라면 거북이의 머리가 있는 곳은 구지봉이다. 일제 강점기 거북의 목 부분을 잘라 무산 마산을 잇는 도로를 만들었으니 김해의 맥이 끊겼다고 했다.
일부 김해를 사랑하는 이들의 항의에 다시 목을 잇고 나서 김해의 발전을 지원하는 여러 유명 인사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구름다리인 구지터널 아래로 줄지어 차들이 드나들고 주위 아파트 주민들의 핏줄이 되어 쉴 새 없이 오간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편의와 경제성, 접근성으로 도로는 나기 마련이다. 허 왕비릉 입구의 소나무에 기대어 우리의 현재 삶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분산을 바라보며 땀을 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