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온 나라가 피난 가기에 바빳고 국록을 먹는 수령들도 달아나기와 숨기가 일수인 판국인데도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의 사공(四公)은 아무런 직책도 책임도 없는 백의은사(白衣隱士) 등의 몸으로써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왜적과 싸우려고 스스로 총칼 앞에 나섰다.
이러한 사공의 충절이 부사와 도백을 통하여 조정에 알려지자 증직(贈職) 의 은전이 내려졌고 사회적으로는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하는 등 국가적 사회적으로 숭봉(崇奉)하고 있는 것이다.
네 명의 의병장은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김해성을 공격해와 성의 주장군이던 서례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각기 의병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끝까지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임진왜란 후 3년만인 1600년(선조 33년)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며 각자 벼슬을 올려줬고 1708년(숙종 34년) 지방사림의 도움으로 지금의 동상동에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가 1833년(순조 33) '표충사'라 이름했다.
1871년(고종 8년) 단을 설치해 ‘사충단’이라 하고 비를 세웠으며 동래성 함락 후 김해성으로 쳐들어 온 왜적에 맞서 사흘 간 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음력 4월 20일 매년 제례를 올리며 우국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다.
임원식 김해시 문화재과장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김해 사충신을 조명해 잘 알려지지 않은 김해지역 의병 연구에 의미 있는 첫 발을 떼는 기회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임진왜란 의병의 시초가 된 김해 사충신을 탐구하는 학술회의가 지난 7일 오후 2시 인제대학교 인정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동서대 김태영 교수, 진주교대 임종욱 교수,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 경상대 남명학연구원 조구호 교수의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임종욱 진주교대 교수는 "사충신에 대한 문헌 기록은 과거의 것에만 국한될 이유는 없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확산되고 전파도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 지역에 국한된 충절로만 여겨져 사충신의 의연한 순절이 전국적인 관심의 밖에 있는 듯해 아쉽다"면서 "다른 많은 순절의 기억처럼 사충신의 위업도 널리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는 "김해성 4충신에 관해서는 김해 사람들은 물론 학자들도 잘 모른다"며 "주야장천 가야 타령만 한다고 해서 김해 지역사가 반듯하고 균형 있게 놓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서 그는 "김해의 향사인 허경윤 등의 문집이 옮겨져야 한다"면서 "대눌 노상익과 소눌 노상직 형제가 편찬한 선친 노필연의 <극재집>에 '김해향사 7인열전'이 실려 있다는데 아직도 번역되지 않아 접근할 수가 없다"고 했다.
조구호 남명학연연구원은 "역사는 단지 역사책 속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사충단의 관리와 제향(祭享)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사충단을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의 교육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