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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8>“50만 김해 - 근대50년” 낙동강 삼각주 비옥한 토양 고등채소 발원지 대동면(大東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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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시리즈<18>“50만 김해 - 근대50년” 낙동강 삼각주 비옥한 토양 고등채소 발원지 대동면(大東面)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4.02.24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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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는 경상남도 2011년 지역신문발전지원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된 영남매일이 위 기금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경남도 김해시 대동면(大東面)은 김해시의 여러 면 단위 중에 제일 동단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초정리 백두산과 상동면 장척산을 경계로 김해시 상동면에, 동쪽으로 낙동강 본류를 경계로 경남 양산시 물금읍과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남쪽으로 서 낙동강을 경계로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 서쪽으로 김해시 불암동을 경계로 김해 시내에 이른다.

대동면은 낙동강 본류와 지류를 낀 강(江) 동네다. 대동면은 마을 입구에 있는 수안리 선암마을부터 끝 마을인 덕산리 신촌마을까지 강에서 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 해광사에서 내려다본 부산대사리와 선암마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낙동강 본류와 지류에 맛있는 조개종류와 펄펄 뛰는 민물새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감추어 사라지고 없다.

현 대동면은 면 소재지인 초정리 원지마을을 비롯해 10개 리(조눌리, 월촌리, 덕산리, 대감리, 괴정리, 예안리, 주동리, 주중리, 수안리)에 32개 자연마을(선암, 수안, 주중, 주동, 성안, 원동, 신명, 신안, 마산, 시례, 장시, 초정, 원지, 안막1,2,3구, 신정, 괴정, 지나, 감천, 소감, 감내, 덕산, 월촌, 평촌, 하사, 조눌, 신동1,2구, 고암, 신촌, 신암)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해부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하동면(下東面)이라고 불렸으나 발음이 하등(下等)과 비슷하다 하여 1944년 일제강점기 때 대동면(大東面)이라고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하동면(대동면)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1757~1765년에 사이에 제작된 여지도서이며 그전 기록에는 1145년의 삼국사기와 1270년의 삼국유사에서는 황산하,황산강(하동면 지역의 낙동강 옛 명칭)등으로 통칭으로 불렸다.

1425년의 경상도지리지와 1454년의 세종실록, 1469년의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는 황산강, 덕산역(덕산리), 감물야촌(대감리), 황산원, 초령원(초정리), 황산진, 수다부곡(수안리), 달음포향, 동원진 등으로 좀 더 상세히 나타난다.

   
 
  ▲ 산해정(경남 문화재 자료 125호).  
 

수안리는 물한(안)리라 불리기도 하며 선암마을과 수안마을이 속해 있다. 수안과 선암마을은 고려시대 수다부곡이 있던 지역으로 명산이 있다고 풍수에서 말하는 곳이다. 윗 담과 아랫담으로 나뉘며 위담에 `보현사`라는 절이 있으며 아랫담에는 `해광사` 라는 절이 있다.

선암마을은 시내 불암동과 경계를 이루며 신선 바우(신선암)라 불린다. 지금은 그 자리에 남해고속도로가 생겨 사라지고 없지만 옛날에 바위 속 동굴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동리는 옛날에는 주부동으로 불렸다. 옛날 중리마을이 황금 술통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며 한편으로는 남명 조식 선생이 주부 벼슬을 하면서 이곳에 지냈다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주동리라는 명칭은 주부동의 동쪽에 있다하여 1914년부터 불리어지고 있으며 성안마을, 원동마을이 속해 있다. 원동마을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산해정(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125호) 신산서원이 있다.

몇 년 전 마을 뒷산 돛대 산(일명 조차산)에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하려던 순간 안개에 시야가 가려 중공민항기가 산 정상에 부딪혀 불타는 사고가 발생해 수많은 아까운 목숨이 유명을 달리했던 안타까운 과거가 있기도 하다.

 

   
 
  ▲ 정구지 농장.  
 

주중리는 옛 명칭 선유동의 상리 중리 하리의 중간마을인 중리에 있다 하여 임진왜란 때 지금의 이장격인 동수가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뒷산의 명당에서 이름난 천손이 날것이라 전해진다.

주중교를 경계로 주동리와 분리된다. 수안리로 가는 길목에 선만 고개가 있는데 그 옛날 포구가 아니었나 여겨지며 아이러니하게 포구나무 한 그루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세월을 지키고 있다.

예안리에는 시례마을, 장시마을, 마산마을, 신명마을, 신안마을이 속해 있으며 대동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다. 주로 꽃 농사와 채소농사, 부추농사를 지으며 부농의 꿈을 키워 가고 있는 알부자가 많은 동네이다.

장시마을에는 사적 제261호인 예안리 고분군이 있다. 1976년에서 1980년까지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181기의 고분을 조사 발굴하여 고고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7세기경의 가야시대의 문화를 상세하게 밝혀줄 많은 유물과 무덤이 발견되어 김해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시례마을에는 사회복지시설인 동광육아원과 시례저수지가 있어 가뭄에 대비하여 많은 맑은 물을 저장하고 있다.

   
 
  ▲ 서낙동강이 시작되는 대저수문에서 바라본 석양(부산 대저와 김해 대동의 경계지점).  
 

초정리는 대동면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대동초등학교, 중학교, 우체국, 원명사, 백두산 등이 있다. 초정마을, 원지마을, 신정마을, 안막마을(1,2,3구)이 속해 있다.

1967년에 준공된 운하천은 낙동강 본류와 연결되는 월촌리 수문에서 시작되어 감천마을, 괴정마을, 원지마을, 안막 1구 마을 등 여러 동네를 거쳐 신정마을 끝자락에서 대동 수문이 있는 서 낙동강과 만나게 되어 있다.

대동 수문이 지금은 대저가 부산에 편입되면서 대저 수문이라 명칭이 바뀌었지만 불과 이삼십년 전에는 대저, 명지, 녹산, 가락은 김해의 땅이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차량이 많지 않은 때라 수안리 선암마을에서 시작된 비포장 자갈길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대동면 중심을 가로 질러 달리다 원지마을 어귀에서 양쪽으로 갈려 왼쪽으로 가면 덕산고개를 지나 상동면이 오른쪽으로 가면 대동 수문을 지나 대저면이 나타났다.

지금은 안막마을 대저 수문 옆으로 얼마 전 완공된 대동화명대교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낙동강을 가로 질러 차량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그 밑으로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말이다.

   
 
  ▲ 옛 대동 5일장터는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국수집들이 즐비하다.  
 

그녀는 봄을 맞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낙동강 제방 둑 위로 첫사랑 순정을 못 잊어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벌써 얼마나 걸었을까.

구포다리, 대저 섬장과 번덕마을을 지나 저만치 대저 수문이 보인다. 강 위에는 낙동강 유람선도 보인다. 배 가득 사람들을 태우고 구포선착장을 향해 느릿느릿 통통거리며 가고 있다.

배 쪽으로 손을 힘껏 흔들어 본다.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배에 타고 있는 것일까!

서울의 여의도 한강 둔치에는 유람선이 정기 운항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낭만과 추억을 되살린 지가 오래되었다. 김해에서도 부산과 협조하여 낙동강에 유람선을 띄워 새로운 관광명소로 활용하면 어떨까?

삼십 년 전 대동과 구포를 오가던 도선처럼 대동화명대교 바로 밑에 선착장을 만들어 다시 배를 띄워 관광객을 유치해 보자고 제안해 본다.

   
 
  ▲ 대동에서 보면 저멀리 구포가 보인다.(대동화명대교)  
 

그래서 부산시와 협의하면 김해 가야시대 김수로왕과 연계하여 밀양 삼랑진과 양산 원동 기찻길 낙동강 칠백리를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허구헌날 계획만 세워 용역비로 국민세금만 축내는 엉터리 짓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괴정리에는 괴정마을과 지나마을이 속해 있으며 초정리 백두산(352m)과 경계를 이루며 괴정이란 우물가에 커다란 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되며 마을 정상 부위에 일제강점기 때 제방을 쌓아 논농사를 지었다.

지나마을은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서쪽 산 정상에 민족의 핏줄인 태백산맥의 최남단 낙남정맥 자리로 알려져 있다. 낙남정맥이라 쓰인 안내 표지판이 있어 여기서 동쪽을 바라보면 우리 민족의 젖줄인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마을 앞에는 중앙고속도로 관문 대동IC와 톨게이트가 있다.

대감리에는 감내마을과 대감천, 소감천마을이 속해 있다. 감내마을에는 대감초등학교와 감내 지석묘가 있다. 대감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 폐교위기에 처했으나 학부모회가 노력한 끝에 스쿨버스를 운영하여 멀리 있는 학생들을 실어 나른 다음부터 폐교를 면해 지금은 서로 학교에 들어 가려고 할 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감천마을은 속이 알찬 부자 마을로 소문이 날 정도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도시민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눌리에는 조눌마을, 신동마을, 하사지 마을이 속해 있다. 조눌이란 명칭은 새의 울음소리가 마치 먹이를 더듬는 소리와 같다 하여 새누리(?)라고도 부른다.

   
 
  ▲ 대동초등학교 정문(뒷면에 보이는 산으로 올라가면 초정리 백두산이 나온다).  
 

옛날에는 조눌진이 있어 맞은편 부산 금곡동에 있었던 동진으로 건너갔다 왔다 하였다. 하동면 시절에는 경찰서가 있었지만 지금은 초정리로 옮겨져 있다. 하사지는 낙동강 모래로 형성된 톱으로 홍수가 나면 못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신동마을은 조눌리에서 새로 생긴 마을로 초정리 안막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지금은 둑 넘어 낙동강 둔치에 4대강 사업 후 친수녹지공간으로 조성되어 운동장과 생태체육공원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다.

월촌리에는 월촌마을과 평촌마을이 속해 있다. 그 옛날에는 월당리라 불렸고 황산진, 동원진, 월당진은 같이 사용된 말로 여겨진다. 그리고 일제 때 사용하던 월당수문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평촌리를 합한 후 월촌리로 변경되어 불리며 평촌이란 마을 이름은 기러기가 날아 가다 평평한 낙동강 모래밭에 앉아 놀고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1949년 대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을 전소시켰는데 그 당시 이재민이 600여 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각성산이 성이 있어 생긴 산 이름이며 신라시대 때 지은 절로 추정되는 오래된 문수암이 있다.

마지막으로 덕산고개만 넘으면 상동면이다. 덕산리에는 덕산마을, 고암마을, 신촌마을, 신암마을이 속해 있다. 덕산이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며 고려시대부터 덕산역과 덕산원이 있었다.

덕산진에서 낙동강 건너 양산군 물금읍으로 건너갔다. 고암, 신촌, 신암 마을은 상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발아래 유유히 몇백 년을 굽이치며 흘러온 낙동강을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어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금도 부산 사람들은 덕산 정수장에서 공급하는 물을 이용하고 있다. 

   
 
  ▲ 대동면사무소.  
 
   
 
  ▲ 해광사(수안마을).  
 
   
 
  ▲ 사회복지법인 동광육아원(시례마을).  
 
   
 
  ▲ 시례저수지(시례 전골).  
 
   
 
  ▲ 시례저수지의 물을 부산 대저동로 보낸 수도관(신안마을).  
 
   
 
  ▲ 그 유명한 대동 할매 국수집.  
 
   
 
  ▲ 예산부족으로 중단된 대동화명대교 끝자락 공사중단지점(대동면).  
 
   
 
  ▲ 옛날 대동-구포간 유람선 선착장(낚시점과 식당들이 있었던 자리).  
 
   
 
  ▲ 대동톨게이트(괴정마을).  
 
   
 
  ▲ 대동 생태체육공원.  
 
   
 
  ▲ 월당정수장.  
 
   
 
  ▲ 문수암.  
 
   
 
  ▲ 덕산정수장.  
 
   
 
  ▲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제261호).  
 
   
 
  ▲ 산해정 입구.  
 
   
 
  ▲ 대동 원명사.  
 
   
 
  ▲ 대동화명대교(20년전 대교밑으로 구포와 대동을 오가는 유람선이 있었다).  
 
   
 
  ▲ 대동 운하천.  
 
   
 
  ▲ 초정리 백두산 정상 팔각정이 보인다(시례저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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