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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슈기사>삼성그룹 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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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슈기사>삼성그룹 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
  • 조유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13.03.05 0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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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마냥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마냥 흔들리지 않게 준엄함을 뜻하는 호암은 이병철의 호이다.

호암은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 최고 기업 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기업인의 대명사이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 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 호암선생이 생활했던 생가의 사랑채.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 제일, 합리 추구로 대변되는 철학을 가진 경영자로 가시적 업적에 못지않게 신념과 경륜을 가진 경영의 여러 분야에 걸쳐 원칙을 제시하고 또 일관된 실천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교훈을 남겼다. 또

한, 민족문화의 유산을 더 이상 해외에 유출시켜서는 안 되며 영구히 민족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호암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20여 년간 문화재 수집에 정열을 쏟았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들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에나, 정부나 관계기관에서 민간에 산재하는 문화재를 수습할 능력이 전혀 없고 밀반출을 막기에도 역부족일 때에도 호암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호암 이병철의 생애를 통해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을 만들기까지 호암의 행적과 문화재를 통해 기업의 사회 환원이 꼭 돈이 아닌 문화재로도 우리에게 많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학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사회 환원의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 기업가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보게 되고 이런 호암의 노력은 경제학적으로 우리가 학습해 온 기업의 최대 목표인 최대 이윤창출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를 알리는 표지석이 생가 입구 담장에 부착되었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번지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끈 삼성그룹 창업자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곳으로 의령 9경 중의 하나다. 2007년 11월 19일부터 일반에게 공개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흐르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이곳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회장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병철 회장은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 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하여 다니다가 이듬해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중동중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 박두을 여사와 결혼했다.

이병철 회장은 열 살까지 중교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당시 일본인들이 가르치던 근대적인 학교인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마침 이병철 회장의 둘째 누님이 그곳에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누님의 시댁은 허씨 집안이며, 그 집안은 지수면의 대지주 중 하나였다.

이병철 회장은 지수보통학교에서 1년을 다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수송보통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 자신이 좀 더 큰 대처로 나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수송보통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경상도 시골 출신이라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바람에 서울 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 상당한 애를 먹었다.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다 중동중학의 속성과로 옮겨 수학하던 중 1928년, 18살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전념하던 이병철 회장은 1930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낸 사회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이병철 회장은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마산에서 정미업, 운수업, 부동산업을 하며 사업경험을 쌓았으며 무역업을 통한 사업보국의 뜻을 펼치기 위해 1938년 3월 대구시 인교동에 자본금 3만 원을 들여 삼성 상회를 설립했다.

삼성 상회는 만주와 베이징 등에 청과물과 건어물 등을 수출하는 한편 내수판매도 겸했다.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은 이병철 회장은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탁주와 청주, 소주뿐만 아니라 사이다까지 생산하며 삼성의 토대를 쌓았다.

이병철 회장은 해방 후 무역업에 재도전하기 위해 서울로 무대를 옮겨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창조하는 기업가’ 이병철 회장은 사업을 하는 기업가였지만 삶의 의미가 ‘돈 벌기’는 아니었다. 이병철은 제일제당으로 우리 식탁 위의 먹거리를, 제일모직으로 우리 땅에서의 멋을, 자연농원으로 근사한 휴식을, 반도체로 미래 산업의 새로운 풍경을, 삼성생명으로 마음의 평화를, 그리고 신라호텔로 최고의 서비스를 창조해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 "사람이 기업을 하는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는 금전욕을 뛰어 넘는 창조적 충동이라고 할만한, 무엇이든 값어치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본능과 이에 따르려는 의욕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병철 회장은 언제나 도전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청년이었다. 1983년 이병철은 일흔넷의 나이에 ‘산업의 쌀’이라고 부르는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다. 부존자원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안으로 반도체를 생각한 이병철은 반도체, ‘64KD램’을 위해 몰두했으며 이는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이병철 회장의 집안은 원래부터 천석꾼은 아니었고 할머니가 근검절약을 하여 천석 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 집안이었고 자연스럽게 이병철은 천자문, 사서삼경, 통감, 논어 등을 배웠다.

그로 인해 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유교를 가르치는 유일한 대학인 성균관대를 인수하고 그 대학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후 학내분규로 인해 학생이 교수를 때린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미련 없이 성균관대학을 한 때 국가에 헌납하기도 한다.

   
 
  ▲ 생가 창고벽에 세워져있는 탈곡기와 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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