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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5개 훈장 받은 89세 이용덕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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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5개 훈장 받은 89세 이용덕 옹
  • 최금연 기자
  • 승인 2012.11.28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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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훈장 다 필요 없는 것이다
가락초등학교 졸업, 김해농업고등학교 교사와 교장, 35년 후진 양성
매달 12만 원의 보조금으로 생활... 라면 한 상자 3개월 아침 식사

   
 
  시력과 청력, 기억력 등이 50대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이용덕 옹.  
 

작은 체구에 단정한 외모,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정갈함 너무나 깨끗하고 잘 정돈된 가구와 침구류, 서적, 주방 등이 기자를 부끄럽게 했다.

영남매일이 만난 금주의 주인공은 올해 김해시 내외동 한국1차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고 계시는 89세 이용덕 어르신의 집을 방문하고 뵌 첫 느낌이다.

35년의 교직 생활과 국민의 복리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국민훈장을 5개나 받은 이용덕 어르신...

외모만큼이나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집안은 89세 노인이 사는 집 같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집엔 꼭 필요한 가재도구만 있었으며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난방을 안 하셨는지 냉기가 감돌았다.

어르신을 찾던 그날은 마침 노인복지회관에서 치료를 위해 물리치료사가 방문하는 날이었다. "몇 해 전 다리를 다쳐 이렇게 선생님께서 오셔서 치료해 주신다"며 미안해하셨다.

치료를 위해 누우신 어르신은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치료사 선생님께 몸을 맡기셨다.

점퍼를 벗자 앙상한 어르신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긴소매가 아닌 짧은 반소매 티셔츠에 겨울 내의는 입지도 않았다. 집안에서도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다.

"이 집에 살면서 보일러를 한 번도 켠 적이 없다. 우리 집은 항상 18도에서 19도다. 이 정도면 겨울은 끄떡없다. 밥도 5일에 한 번씩 한다. 한번 해서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먹을 때 데워서 먹으면 된다."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어르신 국민훈장을 다섯 개나 받았는데 국가에서 주는 혜택도 좀 있을 것 같은데 지원은 없습니까.

"예. 없습니다."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자랑스런 훈장과 이용덕 옹(교장퇴임시 촬영).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때 각각 국민포장 2개와 국민훈장 동백장, 석류장, 보이스카우트 훈장을 받았다.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훈장을 한 개도 아닌 다섯 개나 받으신 이용덕 어르신의 생활은 검소함을 뛰어넘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1924년 그땐 김해였던 가락면 북정리에서 태어나 가락보통학교(현 가락초등학교(14회)를 졸업했으며 검정고시로 경남대학교 제7회 정경과를 졸업했다.

함안농업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 사천농업고, 합천농업고, 김해농업고, 거창농업고 등을 거쳐 1989년 8월 31일 거창농업고등학교에서 평교사 10년, 고등학교 교장 20년, 중등부 장학사 5년 등 35년의 교직생활을 마쳤다.

1946년 설립된 김해대표 고등학교인 김해농업고등학교(현 생명과학고)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발전상을 봤으며, 요즘 말하는 특목고(특수목적고등학교)를 최초로 설립하여 9년을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학교 수가 많지 않아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해서 다녔다. 그래서 요즘처럼 학교생활을 어렵게 하거나 불량스런 학생들은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나이 많은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김해농교에 재직할 때는 교사인 이용덕 어르신과 한 두살 차이 나는 학생이 많았단다. 왜냐하면 해방되고 일본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동포들의 자재들이 학교에 입학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환동포들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어렵게 학교에 다니거나 요즘처럼 문제청소년은 없었다고 한다.

"매를 들면 흥분한다. 선생도 사람이기에 본래의 감정이 있다. 내가 교장으로 있을 때 선생님들께 지휘봉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합천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여선생이 지휘봉으로 학생의 머리를 때렸는데 그 학생이 기절했었다. 여선생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살짝 때린 것이 그렇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매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신다.

"애들을 오냐오냐하며 키워서도 안 된다. 자주하면 잔소리가 되지만 때때로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를 해 주어야한다"며 "요즘은 잘못을 가르쳐 주는 어른이 없다. 아이들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니 ~"

"그땐 고등학교라곤 농업고등학교 전부였고 경남에 25개 학교가 있었는데 퇴임할 즈음엔 18개 정도였다"고 안타까워하는 어르신은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경남의 졸업생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중에서 일본 영농과의 교류였다. 그 당신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영농 쪽으로 조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축산과 원예 등의 견학과 연수가 많았는데 그중에서 축산이 한창 활성화할 때였다.

   
 
  일본 견학 당시 장면.  
 

그때 일본엔 농업교육협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협회와 경남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과 교류를 통하여 견학도 하고 연수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중에서 `신메이 축산`이라는 곳엔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연수와 견학 실습 등을 가기를 원했는데 이용덕 어르신이 그 역할을 다 했다.

"아마도 국가에서 이런 일을 했다고 훈장을 준 것 같다.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일 잘하라고 꼬신거다"며 어르신은 허허롭게 웃으셨다.

이용덕 어르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고 조리법까지 일러주며 수줍게 웃으신다.

"아침에 라면 반개를 끓여 먹는데 라면은 그냥 끊여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 집에 있는 무나 시래기 같은 채소를 넣어 먹으면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 그렇게 한번 끓여 먹어 보세요"라며 권하기도 했다.

많이 먹고 잘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많이 먹으려 해도 먹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르신 스스로 음식에 대한 어떤 기준을 두고 있었다. 요즘은 너무 잘 먹고 많이 먹어 몸에 병이 생긴다며 소식과 운동을 권하신다. 소식과 하루 20~30분의 걷기와 맨손체조로 89세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

"자유가 너무 지나치다 보니 양보심도 책임감도 부족하고, 나누고 베풀면 함께 하겠다는 상생의 정신이 사라지고 이기주의적 사회로 변화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시기도 했다.

"김해보건소로 다니는 공원 옆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들어 놓은 길로 다니지 않고 공원을 가로질러 다닌다. 가면 얼마나 빨리 간다고 길을 따라 가면 되는데~"라며 시민의식에 대해 못내 안타까워하셨다.

   
 
  김해노인복지센터 물리치료사와 자원봉사자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치료를 해주고 있다.  
 

요즘은 역사 서적과 족보연구와 정리에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경주이씨 덕도 문중 후손인 이용덕 옹은 89세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로 시력이 너무 좋아 족보의 깨알 같은 글씨도 안경 없이 보시고 쓰시기까지 했다.

이 옹은 문중의 70대손까지 조상님들의 성함을 기억하고 계실 정도로 기억력도 탁월했다.

60년 전부터 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했다는 다 헤어진 영어 일어 한문 한글 사전의 그 작은 글씨도 줄줄 다 읽으신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함께 탄 주민에게 어르신이 먼저 인사를 한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라고...

   
 
  깔끔하게 정리된 침실.  
 

1959년 창건된 김해성당 본당 회장직을 8년여를 맡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이용덕 어르신은 신앙생활에 대해 "참되게 살아보겠다고 노력 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야사와 시조 등 역사에 박식함을 가지고 계시며 어느 누가 수로왕과 허왕후에 대해 물어도 막힘없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시조도 외우고 김해역사도 공부한다"고 한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경남의 사도가 되기 위해 오늘도 이용덕 어르신은 냉기가 서려 있는 작은 방에서 오래전의 식물도감과 낡은 앨범을 뒤척이고 가야사를 공부하며 경주 이씨 덕도 문중의 족보를 정리하고 있다.

전기장판 하나로 이 겨울을 이겨 내야 하는 이용덕 옹은 15년 전 아내와 사별했으며 교장퇴직금으로 받은 자신의 노후 자금은 아들의 사업비로 주었지만 사업이 어려워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9만 원, 장애인 수당 3만 원, 도합 12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가야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식사와 밑반찬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라면 한 사장를 사서 두 동강내어 3개월 동안 아침 식사로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68년전의 학생증.  
 

12만 원 중 아파트 관리비 약 8만원을 내고 집전화비 2천원을 내고 나면 3만 몇 천원이 남는데 그 돈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간식이나 과일, 고기나 음료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으며 수돗물과 가스 전기료는 가급적 사용을 하지 않는 다고 했다.

평일 점심은 보건소 급식소에서 해결하고 쌀은 동사무소에서 주는 5kg로 한 달을 버티고 계셨다. 이러한 사연을 망설이다가 부끄럽다며 조심스레 들려주시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미안한 것은 우리다. 세상에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한국농업발절을 위해 35년간 헌신한 가장 존경받아야 할 우리의 참 스승에게 정부도 국민도 김해사람도 너무 소홀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52만 김해시민 중에 역대 4명의 대통령으로부터 훈장 5개를 받은 사람은 이용덕 옹 말고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랑스럽고 훌륭한 교육지도자가 자신의 고장 김해에서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고 계셨지만 우리는 외면했다.

"훈장 그것 다 필요 없다. 아무 쓸 대도 없는 고물이다" 그래서 일까 집안 어디에도 대통령훈장증과 훈장은 보이지 않았다.

자주 찾아뵙기로 하고 돌아 왔지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다정했던 초등학교 친구들 (원안 이용덕 옹).  
 
   
 
  75년전 초등학교 졸업앨범.  
 
   
 
  60여년 동안 간직한 사전이 고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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