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一然禪師)의 민족애(民族愛)가 겨우 그 매몰의 압력 속에서 구출해낸 `가락국기`를 역대 한족계열(漢族系列)이거나, 그 세력에 영합해야 한 사관(史官)들이 탄괴지서(誕怪之書)라 규정하고, 정사(正史)의 근처에도 못오게 만든 이유의 하나가 이로써 명백해진다.
![]() | |
그것은 고대 동서(東西)문화 교류의 대동맥이던 실크로드 가운데도 활발한 교류 실적을 가진 해상(海上)의 루트를 없는 것으로 해야만, 동북 아시아의 모든 문화는 한족들의 은덕(恩德)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고정(固定)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해상의 루트의 최종착지인 가락국으로 부터, 그 당시로서는 문명의 최첨단 소재이던 철(鐵)을 공급받던 한(漢)의 후예나 왜(倭)의 후손들이 이 역사의 사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가락국`을 없었던 나라로 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불가결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 | |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락국기`를 아무런 선입감 없이 조상께서 손수 물려주신 유산으로 받들어 그 기록을 충실히 음미해서 이처럼 세계사(世界史)와 직결하는 가설을 성립하게 되었다.
이제 이 가설을 하나하나 현장검증을 통해서 증명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나의 제3의 과제(課題)가 아닐 수 없고, 그 제3의 과제는 `진주태후허씨`의 `진주`의 현주소를 찾아내어 그곳으로 가서, 잃어버린 한국사와 세계사의 고된(Link)를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 | ||
▲ 물시계. | ||
최초의 물시계 `시동호(侍銅壺)`양과청소(兩過淸宵)하시고, 일경백주(一經白晝)하신 욱궁이고 보면 다음날의 유궁 출발은 이른 아침일수 밖에 없다.
8월 1일, 희락(廻樂)할새, 여후동렴(與后同輦)하시고, 임신부처는 재록병가(齋錄병駕)하더라. 그 한사잡물(漢肆雜物)도 감사승재(感使乘載)하여, 서서(徐徐)히 입궐(入闕)할제, 시동호(時銅壺)는 욕오(欲午)하더라.
다시 어려운 자가 나열되는 이 귀절을 옮기면 8월 1일에 행차를 돌리실제, 수로왕은 왕후와 같은 연(輦)을 타시고, 임신은 말을 타고 그 부인은 가마를 탔으며, 갖가지 박래(舶來)한 혼수(婚需)들은 수레에 실어 서서히 입궐 하였을 때 시동호(時銅壺)는 정오(正午)를 알리고 있었다.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시동호욕오`이다. 우선 `욕오(欲午)라는 말은 `정오가 되려하다`이지만, `시동호`란 무엇이겠는가?
![]() | |
우리 손으로 국역(國譯)된 대표적인 `삼국유사`는 이 귀절을 `서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는 오정이 되려 하였다` 이렇게 이 귀절을 옮기고 있다.
이 `시동호`에서 `동호`는 빼버리고, `시(時)`만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우리는 `삼국유사`가 초록한 `가락국기`의 어느 한 글자도 빼거나, 조작하지 않고 여기까지 읽었다.
그러므로 `시동호`라는 생소한 명사(名詞)도 `아유타국`과 마찬가지로 가공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시동호`라는 이름을 밝힐 문헌(文獻)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때를 알리는 구리 항아리`이다.
그런데 구리 항아리 위에 `시`가 붙은 것, `시`와 `동호`의 합성어(合成語)인 이 `시동호`는 시각을 알리는 구리 항아리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물(水)시계일 수 밖에 없다.
후대에 와서 `누각(漏刻)`이 바로 이 `시동호`일 것이다. `니혼쇼끼(日本書記)`를 보면, 서기 671년 백제의 기술지도로 제작한 물시계는 세개의 누호(漏壺)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서기 718년에 신라에서 누각전(漏刻典)이라는 물시계 담당부서가 생겼고, 박사 6인, 사(史) 1인을 두었다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의 물시계는 오랜 옛부터 전수되어 개발해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일본을 포함한 고대왕국에서 물시계로 시작을 측정했다는 최고(最古)의 기록도 가락국이 보유하고 있음을 `가락국기`는 증언하고 있다.
![]() | |
그 `철(鐵)`과 이 `시동호`는 가락국의 해운력(海運力)이 실어온 비한족 경유(非漢族 經由)의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이 없다.
이 문화수준에다가 다시 새로운 문화세력(文化勢力)의 도래(倒來)의 사실이 문화사(文化史)의 측면에서 본 허황후의 가락국 당도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