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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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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7.28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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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세기 48년 음력 7월 28일.
가락국의 별포(別浦)를 떠난, 비단 450필(疋)은, 로마제국의 귀족들의 의상으로 배달된 동방(東方)의 실크의 반출(搬出)에 관한 유일한 증언이다.

 
   

그 엄청난 교류의 길, 실크로드-무엇이 이 길고 험한 길을 이은 원동력이었을까?

무사히 로마까지만 송달되면, 천평(天枰) 한쪽에 비단을 얹고 또 한편에 황금을 얹어 맞바꿨다는 로마사(史)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비단은 곧 황금인데, 황금을 무사히 로마까지 전달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그리고 비단의 산지(産地)에서는 무엇을 받고 그 비싼 비단을 내주었겠는가?  

이 지역에서 그 비단의 중요 산지이던 변진(弁辰), 곧 가락국의 경우, 우리는 그 댓가가 철(鐵)이었다고 추측된다.

앞에서 인용한 중국의 사서(史書) `삼국지(三國志)`는 가락국의 영역에서 `겸포(慊布)`와 함께 `철(鐵)`에 관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 김해시 동상동 연화사내 있는 왕궁터 표지석.  
 

국출철(國出鐵)하여 한예왜(韓濊倭)가 비종취지(皆從取之)하느니라.

제시(諸市)에 매(買)함에 개용철(皆用鐵)함은 중국(中國)이 용철(用鐵)함과 여(如)하며, 또한 써 이군(君)에 공급(供給)하느니라.

`국출철`이란 `가락국이 쇠를 낸다`는 뜻이며, 그 쇠(鐵)를 `한(삼한)`과 `예(濊)`와 `왜(倭)`가, (함께 거기서 얻다)라고 증언하였다.

가락국이 내는 철을 이웃 마한(馬韓), 진한(辰韓)은 물론, 북쪽 예(濊)도 바다 건너 왜(倭)도 모두 얻어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매매(賣買)의 장(場)인 여어저자에서는 `철(鐵)`을 중국(이 중국은 오늘 우리가 쓰는 중국대륙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국명)에서 전(錢)을 쓰는 듯 하였다고 증언한다.

결국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데 쓰인 화폐(貨幣)가 돈이 아니라 쇠(鐵)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 한(韓)이나 예(濊)나 왜(倭)는 무엇을 가지고 와서 이 철을 사가지고 간 것이겠는가?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황금(黃金)보다 더 절실한 실용의 신소재(新素材)를 얻는 댓가로 이들만이 생산할 수 있는 실크(絹)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증언에서 주목할 사실이 또 있다. 그것은 `공급이군(供給二郡)`이라는 네글자이다.

`이군`이란 그 당시 한민족(韓民族)의 한반도 진출의 근거지이던 `낙랑군(樂浪君)`과 `대방군(帶方郡)`이고 보면, 그 고대의 동북 아시아의 철은, 관습적으로 말해오는 중국대륙 경유가 아니라, 철의 원산지인 중앙 아시아에서 해로(海路)로 릴레이 되어, 한(漢)은 그들의 진출거점인 낙랑, 대방을 통해서 철을 공급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증언은 `철(鐵)`의 고자(古字)가 `철(鐵)`, 즉 오랑캐(夷)의 쇠(金)이며, `오랑캐(夷)`란 한족(漢族)의 동쪽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지칭이었다는 것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더욱 실감나는 증언이 될 것이다.

다시 `가락국기`의 축적으로 돌아가자. 450필의 겸포를 실은 승무원 15명의 대형선박의 회항로는 앞에서 추정한 항로의 역(逆)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가락국 별포→용성궁(龍城國)→나가사끼→오까나와 열도→타이완(臺灣)→푸우ㆍ초우(福州)로 잇는 항로는 이 해역(海域)의 해류(海流)인 리만해류의 남하기(南下期 : 9월~3월)에 맞춰, 불청객인 폭풍을 잘 대피하면서 무사히 아유타국의 북상 거점(北上據點)인 복주(福州)로 당도했을 것이다.

이 복주에서 바다의 실크로드의 기점인 광주(廣州^토인비의 `세계사지도`)에는 Nan-hai로 쉽게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며, 여기서부터는 아유타국의 진출 거점들인, 아유타야를 거쳐 뱅갈만으로 들어가,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 현재로 대형 선박의 항행(航行) 종점인 아요오디아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류셋트.브로노아의 `실크로드`의 제3의 루트에 관한 가설에 이 추리를 대입(代入)하면 다음과 같은 가설이 성립된다.

서기 48년 음력 7월 28일 가락국 별포를 출항한 아요오디아 왕조(王朝)의 기치를 단 대형 범선은 선원 15명에 의해서 적재한 가락국 수로왕의 하사품인 겸포(鎌布) 450필을 나아가사끼(龍城, 현 지명 나가사끼^長崎)경유, 황국(黃國)의 수도였던 복주(福州^진주)로 전달되었다.

이 비단은 다시 광주(廣州)로 운반되어 그 곳에서 수합한 실크와 함께 해로(海路)로 타이(泰)의 아유타야(Ayuthaya)를 거쳐, 인도차이나 반도를 돌아 뱅갈만으로 진입,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종착점인 이요디아(Ayodhya)에서 하륙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육로(陸路)로 인도 서해안(西海岸)으로 반송되어, 대기하고 있던 페르샤제국의 상인들에게 인도되고, 지중해 제국(로마 제국)으로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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