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이 비한문화권(非漢文化圈)의 문화를 주축으로 했었고, 그 권력(특히 해운력)이 강해서 쉽게 신복(臣服)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첩에는 <가락국기>와 마찬가지로 `아유타국`이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 초기에 정리된 <금관고사(金官古事)>라는 책에서 `남천축국` `서역 허국` `허황국`등 이름이 엇갈리는데, 한반도에서 동떨어진 곳의 나라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공통되는 것은 왕후가 `국왕(國王)의 딸(女)이 아니라, 국왕에게 딸린 군(君)의 딸`이라고 한 점이다.
그 `서역 아유타국(西域 阿踰陀國)`은 <가락국기>나 <김해김씨보첩(金海金氏譜牒>에만 나오는 나라의 이름은 아니다.
우선 이 고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의 기록인 현장(玄裝:600~664)의 여행기(旅行記) 권 5에 다음과 같이 `아유타국`이 나온다.
.....비(比)로부터 육백여리(六百餘里)를 동남행(東南行)하여 극가하를 도(渡)하면, 남(南) 아유타국(阿踰陀國)에 지(至) 하느니라.
`아유타`의 `타`가 `陁 `자 대신 `陀`로 바뀌었을 뿐, 음(音)에는 다름이 없다.
그리고 `여기서(此)부터`의 여기는 `곡여성(曲女城)`이고 그 `곡녀성`이 현지명으로는 `카나우지(Kanauj)`이며, `극가하`는 `고그라(Gogra)강`이고 보면, `아유타`는 오늘의 중인도(中印度)북부 갠지스강 상류의 `아요오디아(Ayodhya)`가 분명하다.
이 `아유타국`은 `타`가 `암(闇)`으로 바뀌어 우리 불교사전(운허ㆍ용하 1961)에 나타난다.
그 해설을 옮겨보면,
아유사(Ayodbya) ①중인도의 나라 이름. 아유차(阿踰遮) 아유타(阿踰陀)라 음역. 난승성(難勝城). 불가전국(不可戰國)이라 번역. 인도 고대 문명의 중심지. 부처님이 출현한 후에는 영지라 하여, 여러 승려들이 모여들던 곳.
㉢<서역기> 권 5에 있는 나라 이름. 곡녀성이 남방, 항하의 서안에 있다. 무착(無着). 세친(世親) 시대에는 초일왕(超日王). 신일왕(新日王)의 수도이던 곳.
라 하였다.
그러나 아요오디아의 역사는 불교 이전으로 소급되며,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해진 오늘에도 전 인도 국민의 성지(聖地)가 되어 있는 곳이다.
그것은 아요오디어가 `라아마(Rama)왕`의 왕도였었고, 라아마왕은 태양신(太陽神)의 권화(權化)로 힌두교의 가장 성스러운 신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의 만남
조선시대 5백년 그것은 끊임없는 중국대륙의 압력 속에 지친 우리 조상들의 수난기였었고, 결정적으로 우리를 유린한 것은 일본열도에서 건너온 간악한 도요도미의 군사들이었다.
마침내, 국력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토록 우리를 간섭하던 중국이 신흥 일본군벌 앞에 굴복하자 어쩔 수 없이 한반도의 주권은 일본제국(日本帝國) 손에 넘어간 것이다.
중국의 왕초들이 비한족적(非漢族的)인 문화를 문질러 없애려는 간섭은 조선조 건국 이전, 고려(高麗)말엽부터 본격화 했고, 그 조짐의 일단이 고려의 사관(史官) 김부식(金富軾)이 우리의 고대 왕조사(古代 王朝史)를 정리함에 있어서, 서슴없이 가락국(駕落國) 5백년의 역사를 잘라낸 폭거로 나타난 것이다.
그 중국이 벌레처럼 싫어한 고대의 왕국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락국 이었다.
그들이 한반도의 고대사를 언급할 때는 `가락국`을 탈락시켰고, 겨우 그 국명을 나타낸 것이 `가야`라는 이름이었다. `가야`와 `구야` `가라`와 `가락`이 모두 후일 `가락(駕洛)`이라 한자로 나타낸 것은 그 후손일 뿐 (원본<가락국기>도 후손 金良鑑이 편찬했음) 한족(漢族)의 사관들은 하필이면 `개 구(拘)`자와 `간사할 사(邪)`로 나타낸 것이다.
그 까닭은 단순했을 것이다. 가락국이 비한문화권(非漢文化圈)의 문화를 주축으로 했었고, 그 국력(특히 해운력)이 강해서 쉽게 신복(臣服)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밉고 다스릴 수 없는 이웃에게 악명(惡名)을 씌운 예는 바로 그들 대륙의 남쪽,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일대의 고대국이 있었다.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Min-yueh`라고 표지한 고대국을 중국의 사서(史書)는 `벌레 민(閩 )`으로 표지하여 `민국( 閩國)`이라 했다.
이 민국은 당(唐) 시대에 와서 겨우 중국의 정권이 손을 뻗칠 수 있었던 곳으로 이 `민국( 閩國)`과 `구야`는 그 고대에 있어서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바로 바다의 실크로우드를 잇는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임은 허왕후의 항로(航路)추청 작업에서 분명해져 가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대부분을 중국을 상징적인 종주국으로 삼도록 교육 받은 이들)가 `탄괴지서(誕怪之書 : 괴이한 것에서 말미암은 책)`라 해서 근접하기 조차 꺼리고, 일본인 식민 사관(植民史官)과 그 밑에서 일한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사의 사료(史料)에서 제외시킨 <삼국유사>는, `가락국`을 `구사국(拘邪國)`으로 표기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던 고대의 한족의 사학자와 그 정치적 심리적 배경이 같았음을 차츰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신라의 옛터를 <삼국유사>의 기록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