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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8)-파도를 잠재운 신비의 파사석탑과 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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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8)-파도를 잠재운 신비의 파사석탑과 호계사!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6.16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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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바사석탑은 옛날 차읍(此邑)이 금관국시(金官國時)에 세조수로왕지비(世祖首露王之妃).허황후명황옥(許皇后名黃玉)께서 서역(西域) 아유타국에서 소재(所載)하여 내(來)한 것이니라. 처음에 공주께서 친(二親)의 명(命)을 승(承)하여 범해(汎海)하여 바야흐로 지동(指東)할 새, 파신(波神)이 저(阻)하여 불극(不克)하고 환(還)하여 부왕(父王)께 아룄더니, 부왕이 명하여 이 탑을 재(載)하였더니, 곧 이 첩을 얻어 남애(南涯)에 내박(來泊)하게 되어 비범천기, 주옥(珠玉)의 미(美)가 있더라. 지금 주포(主浦)라 운(云)하느니라.

이것은 <가락국기>의 초록을 수록한 <삼국유사>의 탑상(塔像)편에 실린 `금관성 바사석탑`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왕후의 본국 아유타국은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로 되어 있다.  

서역이란 중국보다 서쪽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광역이므로 이것만으로는 아유타국의 지리상의 위치를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증언에서 왕후의 항해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추려낼 수 있다.

첫째, 왕후의 항해 기간은 두달 전후였었다 (5월에 들어 출항해서 다시 귀항해서 재출발).

둘째, 본국을 나선 승선의 항로는 동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후의 승선을 이날 아침(7월 27일)에 낙동강을 북상하기 전에 가락국의 남쪽 해안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주포(主浦)`라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왕께서 답하여 이르시되 짐(朕)의 생(生)이 매우 성(聖)스러워, 공주의 자원이계(自遠而屆)함을 선지(先知)하였기에, 하신(下臣)의 납비지청(納妃之請)이 있어도 불감종(不敢從)하였소, 이제 숙질(淑質)이 자진(自臻)하니 과인의 다행(多幸)이로다 하였더라.

과연, 수로왕은 아유타국 공주가 먼 곳에서부터 보내짐(居)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선지(先知)`를 출생의 신성성(神聖性)에 돌린것은, 방편(方便)일 뿐 실상은 용의주도한 경영(經營)이 성취한 일임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옛 호계사는 연화사(포교당)가 되었고 연화사는 연못가운데 대웅전 법당이 있고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이 사찰의 연못 물줄기가 흐르는 천(川)을 호계천이라 했다(지금은 복개되었음).  
 

그 신성성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 가락국의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는 일이었기에 구간(下臣)들의 납비(納妃)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예측 불허한 곳에서 왕후를 모셔옴으로써, 그의 출현과 어국(御國)이 천명(天命)이듯 그의 이 밤의 어국침의 짝이 천정(天定)임을 주지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락국의 초대왕후 후보는 훨씬 앞서 수로왕과 그 각별한 측근에서 논의되고 물색되고 결정되어 이 날에 앞서 가락국의 남쪽 해안에 도착해서 약속의 날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합환(合歡)하여 양과청소(兩過淸宵)하고 경백주(一經白晝)하셨더니라.

`수이합환(遂以合歡)`이 네 글자에는 만리의 바다를 서슴지 않고 건널 수 있은 십육세의 여성과 혼미(昏迷) 속을 답보하는 겨레를 이끌어 대해운국(大海運國)을 건국해 낸 남성, 그 강하고 치밀하고 침착하고 의로운 심성과 건강한 육체의 양성(兩性)의 결합을 나타내는 가장 응집된 표현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런 정감을 집약하는데도 경건한 <가락국기>는 이 유궁에서 보낸 신혼부부의 시간에 대해서도 정확을 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7월 27일 저녁에 도착해서 결혼식을 올린고, 다음날 하루를 아름다운 계곡, 폭포를 낀 유궁에서 보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서 가락국의 왕성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맑은 저녁을 두 번 보내고(兩過淸宵) 한낮을 하루(一經白晝)보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어시(於是)에 내선(來船)을 수환(遂還)할 재, 고공즙사가 공(共)히 십유오인(十有五人)이더라. 각(各) 양(粮)으로 갱미십석(粳米十碩)과 포삼십필(布三十疋)을 사(賜)하여 본국(本國)에 영귀(令歸)하였더라.

정확한 기록의 <가락국기>는 왕후를 모시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낸 사실을 기록하면서, 선원(船員)이 15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15명의 선원에게 각각 멥쌀(粳米) 열 섬씩과 천(布)을 38필(疋)씩 하사했다는 것이다.

`석(碩)`은 `석(石)`으로도 쓰는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우리말의 `섬`이고 보면, 한 사람에 10섬(20가마)으로 15명을 합하면 3백 가마라는 방대한 양이 된다.

그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포삼십필(布三十疋)`이다. `포(布)`는 오늘날에는 면직물(綿織物)을 나타내지만, 솜이 우리 생활에 쓰이게 된 것은 중세(中世) 이후이므로 수로왕이 하사하신 `포(布)`는 `겸포(鎌布)`의 준말로 볼 수밖에 없다.

즉, 가장 신빙할 만한 중국의 고사료(古史料)인 <삼국지>에 실린 `변진(弁辰)`에 관한 기록을 보면, "땅이 기름져, 오곡과 벼농사가 잘 되고, 누에와 뽕을 익숙히 다뤄, 비단 천을 만들어 낸다(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作鎌布)"라고 하였는데 `겸(鎌)`이란 합사(合絲)로 짠 비단이며 그 당시로는 최고급 비단인 것이다.

이 `포(布)`가 `겸포(鎌布)`의 준말인 증거는 또있다. 만약 그것이 `면포(綿布)`일 때는 길이의 단위가 `필(疋)`일 수가 없다.

분명히 수로왕은 그날 왕후의 승선이 돌아갈 때 무려 4백5십필(疋)의 비단을 하사한 것이다. 비단 4백5십필은 단순한 하사품이 아니라 무역(貿易)이다.

그러므로 <가락국기>는 문제의 실크로드(Silk Road)에서 급기야는 로마(Rome)의 귀족들의 의상으로 쓰인 비단을 수출한 송장(送狀)의 유일한 증언을 담고 있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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