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 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
곳 :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대청리 유궁
신랑 : 가락국 건국주 수로왕
신부 :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
▲ 김해시 동상동 연화사내 있는 왕궁터 표지석. | ||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였고 가락국 500년의 왕도였다. 시조인 김수로왕이 창건한 가락국은 10세(世)에 걸쳐 5백년 간의 사직을 보존하고, 수로왕이 물려준 그대로의 강토를 지켜왔으니 경계를 살펴보면 수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황산(黃山.신라 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백제 국경), 남쪽으로는 남해이었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이었다.
한편, 이날 아침 승점(乘岾)으로 간 신귀간은 망산도에 봉화가 오른 즉시, 유궁으로 가서, 결혼식 준비를 하라고 분부하셨다는 사실도 이 유궁허의 확인으로 분명해진다.
그 `승점`은 오늘 `상점(上店)`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져, 유궁이 있는 폭포 골짜기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후를 모시고 온 범선이 비범.천기였다는 점과, 신방에 들 신부가 신랑측이 준 속옷을 갈아입는 점과, 곤지를 찍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이날 유궁의 결혼식은 저녁 때 이후, 곧 밤에 거행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제부터 추적하고 확인해야 할 왕후의 출신, 아유타국에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시(於是)에 왕(王)와 더불어 어국침(御國寢)에 재(在)할 새, 왕에게 종용(從容)히 이르되, 첩(妾)은 바로 아유타국 공주로서 성(姓)은 허(許), 명(名)은 황옥(黃玉)이옵고, 연(年)은 이팔이옵니다.
▲ 김수로왕의 왕비(허황옥)가 거주했다는 궁터 연자루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 ||
본국(本國)에 재(在)하던 금년(今年) 5월 중 부왕(父王)께서 황후(皇后)와 함께 첩(妾)을 고(顧)하여 어왈(語曰)하시기를, 야양(爺孃)이 작몽중(昨夢中)에 동견(同見) 황천상제(皇天上帝)하였더니 위왈(謂曰) 가락국의 원군(元君)인 수로는 천(天)에서 소강(所降)하여 대보(大寶)를 비어케 한 내신(乃神)이며 내성(乃聖)임은 오직 기인(其人)뿐이로다.
또한 가방(家邦)을 신위함에 필우(匹偶)가 미정(未定)이니 경등(卿等)은 모름지기 공주를 견(遣)하여 배지(配之)하여라.
언걸(言訖)하고 승천(升天)하시더라. 형개(刑開)한 후(後)에도 상제(上帝)의 언(言)이 아직 재이(在耳)하니 너는 이제 곧 사친(辭親)하여 향피(向彼)하여 갈지니라 하였사옵니다.
마침내 먼 바다를 건너온 왕후는 초야(初夜)를 맞게 된다.
이 우람한 한 쌍의 부부의 첫날밤을 어국침(御國寢)이라 <가락국기>는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왕에게 한 왕후의 신상발언(身上發言)을 소개하는 것이다.
"저는 바로 아유타국 공주이옵고,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이온데 나이는 십육세이옵니다.
본국(아유타국)에 있은 올해 5월의 일이옵니다. 부왕(父王)께서 왕후와 함께 계신 자리에서 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내외가 간밤 꿈에 황천상제를 뵙게 되어, 상제께서 가락국의 건국주 수로왕은 하늘이 강(降)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한 신성한 왕이며, 가문과 나라(家邦)를 새로 일으키는데 아직 배필이 없으니, 너희는 공주를 보내서 짝짓게 하여라 하시고는 승천(昇天)하셨는데, 깨었어도 상제의 말씀은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길로 우리와는 하직하고 그곳을 향해서 가도록 하여라`하셨습니다"이렇게 옮겨지는 왕후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첩(妾)을 부해(浮海)하여 증조(蒸棗)를 하심(遐尋)하듯 이천(移天)하여 반도를 얻듯이 진수(臻首)로 감(敢)히 용안(龍顔)을 시근(是近)하게 되었나이다.
가락국이라는 나라(邦)는 이미 건국되고 그 터전도 다져진 터라, 이제 한 가문(家)을 이루기 위해서 이 결합이 이뤄진 것이었음을 <가락국기>는 분별해서 적었다. 즉, `방가(邦家)`라고 하면 `나라`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을 `가방(家邦)`이라고 적으면 `나라`와 `집`이라는 뜻이 되는 용자(用字)가 그것이다.
결국 왕후의 신상 발언으로 왕후가 이곳으로 출가한 연유가 황천상제의 몽탁(夢託)이 있고, 그항해도 `바다에 떠서 찐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올라 선도(仙桃)를 얻듯이` 이루기 힘든 항해를 성취했다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시종하고 있다.
그러나 수로왕의 경륜(經倫)이 그러했듯이 하늘이라든가 황천상제라든가 하는 보통 사람들이 인지(認知)할 수 없는 초능력자를 내세우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알기 힘들거나 알 필요가 없는 일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며, 그 베일 뒤에는 엄청난 용력(用力)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왕후의 항진(航進)의 실제는 다음 기록에서 그 일각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 허황옥 공주와 함께 온 시녀들 (연출 김해여고생들). | ||
▲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온 허황옥 공주가 수로왕께 문안을 올리고 있다(가락 문화재 재현장면). | ||
▲ 결혼식을 마친 수로왕이 왕비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락 문화재 재현장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