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所齎>한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衣裳), 필단(疋段)과 금은주옥(金銀珠玉),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는 불가승기(不可勝記)이더라."최고급 비단 천에다 옷과 옷감, 금.은.보석, 그리고 신기한 노리개 등은 일일이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창원시 용원 입구에 있는 망산도 전경. | ||
근 30명의 수행과 일일이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혼수는 수로왕이 기다리는 행재소와는 강을 두고 마주 보는 응달리에서 뱃길로 행재소를 향했을 것이 분명하다 (응달리에 왕후가 가마를 멈춘 기념으로 지은 臨江寺라는 절이 있었음).
"왕후(王后)께서 행재(行在)로 점근(漸近)하시자 상(上)께서 출(出)하여 영지(迎地)하시고, 유궁(惟宮)으로 동입(同入)하셨더라."왕후께서 도래하실 제 가마(輦)를 멈추신 인연을 빌어 창건한 가락국의 원당(願堂)이라는 기록만이 남을 뿐, 절터조차 가뭇없는 임강사(臨江寺)가 있었던 응달리 앞에 지금은 넓은 평야 한모퉁이의 흙더미처럼 보이는 구릉(丘陵)이 곤지(坤池) 마을인데, 이 `곤지(坤池)`를 `곤지(坤地)`로도 적고보면, 한자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곤지`를 후대에 당자(當字)한 것이 틀림없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대안(對岸)의 신랑 곁으로 가신 것이니 신부 단장을 왕후가 하신 것이 분명하다.
김수로왕이 허황옥 공주를 맞이 하고 있다. | ||
그렇다면, 그 `곤지`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자, 인도에서는 지금도 하고 있는 곤지일 터이고, 이 고장에서는 처음 곤지 찍은 신부의 출현지라 `곤지섬`으로 일러온 것이 아니겠는가?
앞에서 살핀 속옷 갈아입기가 인도의 <베다>에 연결되듯이, 이 곤지와 다음에서 분명해질 결혼식의 거식 시각과 아울러, 이날 낯선 범선을 타고 오신 수로왕의 왕후의 출자(出自)를 살필 방중(傍證)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이역풍(異域風)의 신부를 맞은 수로왕은 함께 유궁(惟宮)으로 드셨다고 적으면서, <가락국기>는 유궁의 소재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수로왕이 허황옥 공주를 궁으로 데려가고 있다. | ||
그 유궁에서, "잉신 이하 중인(衆人)은 계하(階下)에 취(就)하게 하여 견지(見之)하고는 즉퇴(卽退)케 하시고, 상(上)께서 유사(有司)에 명(命)하시어 잉신부처는 인각일방(人各一房)에 안치(安置)케 하고, 이하 시종(侍從)은 일방(一房)에 오륙인(五六人)을 안치(安置)케 하고, 난액(蘭液)과 혜수(蕙酬)로 급지(給之)하고, 문인(文茵)과 채천(彩薦)에 침지(寢之)케 이르시고, 의복필단(衣服疋段)과 보화지류(寶貨之類)는 다이군부(多以軍夫)를 인집하여 호지(護持)케 하셨더라"
그 유궁에서 우선 마루 아래에서 신부에게 시종한 잉신 부부 이하 수행들의 간단하 인사를 받으신 수로왕은, 측근에게 곧 이들을 유숙할 처소로 안내하게 하고, 그 값진 혼수들은 많은 군사를 풀어 지키게 했다는 사연이 어려운 한자를 나열해서 기록하고 있다.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은 수로왕이 왕비와 함께 마차를 타고 백성들은 둘러보고 있다.(사진 가락문화제 재현 장면) | ||
이 대목을 봐도 `유궁(宮)`의 `유( 帷)`자는 `만전(幔殿)`의 `만(幔 )`자와 다르듯이. 그 용도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즉 `유( 帷 )`자는 `휘장`이며, `만(幔 )`은 장막이다. 휘장은 건축된 건물 내부의 침실 같은 곳에 드리우는 것이고, `만(幔)`은 `장막`으로 건물이 없는 곳에 둘러 싸서 임시 처소(행재소)를 마련하는 곳이다.
지금 왕후가 합혼한 곳이라는 비석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수로왕이 마루 아래서 시종들을 인격했으니, 왕의 처소가 있고 초야를 맞을 신방(新房)이 있었을 터이고, 시종들의 처소로도 최소한 여덟 개의 방이 미리 마련되어 있는 곳이 유궁이었음이 분명하다.
수로왕은 미리 왕의 결혼식을 거행할 궁을 마련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건물이 여러 채 있는 큰 궁이다.
그 궁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을리는 없지만, 그 궁터는 어디에 있을까?
유궁허(帷宮墟)를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도 역시 <가락국기>에 나타난다. 그것은 일연(一然)선사가 초록한 <가락국기>의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군(元君)의 팔대손(八代孫)인 김질왕은 위정(爲政)에 극근(克勤)하여, 또한 승진에 지극하시더라.
김해시 장유면 왕후가 있던 사찰 위 장유암 대웅전 옆에 모셔진 장유화상 사리탑. | ||
세조모(世祖母)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冥福)을 봉자(奉資)하기 위(爲)해, 원가(元嘉) 이십구년(二十九年) 임진(壬辰)에 원군(元君)과 황후(皇后)께서 함께 합혼(合婚)한 땅에 창사(創寺)하여 액왈(額曰)하기를 왕후사(王后寺)라 하셨더라."
즉 가락국 8대왕인 김질왕이 시조왕과 왕후께서 합혼한 땅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지어, 조상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기 452년(元嘉 25년)의 일이었다고 하니, 그 결혼식이 있은 지 404년만의 일이며, 합혼하신 땅이라고 했으니 왕후사의 절터가 바로 유궁허(帷宮墟)가 되는 것이다.
왕후사는 어딘가? 물론 그 절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의 종합 국토지지(國土地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왕후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왕후사는 장유산(長遊山, 一名佛母山)에 옛터가 있는데. 수로왕의 8대손인 질지 왕이 시조부모의 혼인의 자리에 건사(建寺)하여 왕후사로 이름했는데, 후에 절을 파(罷)해서 장(莊:농업용 곳간)이 되었음."
이 증언과 <가락국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아우르면, 서기 48년, 인간이 그 한 쌍의 결혼의식을 거행한 장소로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遺跡)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시사(是寺)가 유(有)한지 오백후(五百後)에 장유사(長遊寺)를 치(置)함에 소납(所納)한 전시(田柴)가 총(總) 삼백결(三百結)이더라.
어시(於是)에 우사(右寺) 삼강(三剛)이 왕후사(王后寺)가 사시지(寺柴地)의 동남표내(東南標內)에 재(在)함 으로써 사(寺)를 파(罷)하여 장(莊)으로 삼아 추수동장지장(秋收冬藏之場) 말마양우(抹馬養牛)의 구(廐))로 작(作)하였도다. 비부(悲夫)일진저."
이렇게 기록하고 <가락국기>의 초록은 끝나고 있다.
결국, 왕후사는 서기 950년 경에는 이 절 동북(東北)쪽에 새로 지은 장유사(長遊寺)로 흡수되어 그 절터는 곡식을저장하고 소와 말을 치는 외양간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냐고, 초록한 일연선사는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일연선사가 개탄하면서 옮겨 쓴 <가락국기>의 이 대목이 있기에 1974년 2월, 실로 그 날의 결혼식으로 부터 1926년 후인 유궁자리에서 가시덤불 속에 여전히 버티고 있는 오랜 석축(石築)과 그 주변에 널린 김해토기의 파편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날의 유궁에서 404년 후에, 효심(孝心)과 부처의 길을 따르려는 숭진의 왕이던 8대왕 김질왕이 깊이 자욱을 남기고(왕후사), 다시 5백년후에는 그 절을 없앴지만, 그로부터 5백년 후에 일연선사는 그 없앤 내력과 위치를 전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장유암(長遊庵)`이라는 이름으로 절 구실을 하고 있는 그 옛적 `장유사`의 동남쪽 계곡을 따라 왕후사의 옛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레 네루 수상(首相)이 말한, `역사는 되풀이 한다!`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역사는 되풀이해서 살아나는 것이다.
살아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락국이라는 고대 왕국의 왕권은 보다 큰 통일왕조(統一王朝:統一新羅) 속에 어울려 없어졌지만 우람한 인격의 한 쌍의 부부가 아름다운 결합을 이룬 자리는 2천년의 시간의 흐름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가 고증하고 유지하는 결혼식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결혼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청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