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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5)-허왕후 바다로부터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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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5)-허왕후 바다로부터 오다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5.26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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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의 영정.  
 

 

   
 
  허왕후의 영정.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였고 가락국 500년의 왕도였다. 시조인 김수로왕이 창건한 가락국은 10세(世)에 걸쳐 5백년 간의 사직을 보존하고 수로왕이 물려준 그대로의 강토를 지켜왔으니 경계를 살펴보면 수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황산(黃山.신라 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백제국경), 남쪽으로는 남해이었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이었다.   -편집부-

"궐(闕)에 주(走)하여 이를 주(奏)하매, 상(上)께서 문(聞)하시고 흔흔(欣欣)하시더라."

궐(闕)은 궁궐이지마는, 그 궁궐에 달려와 왕에게 아륀 사람이 탈락된 문장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연하국(輦下國)인 승점(乘岾)으로 간 신귀간이 아니라, 2km 남쪽 망산도로 빠른 말과 배를 가지고 간 유천간임이 분명하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바다로부터 가락국을 향하여 오고 있는 장면.  
 

달려온 유천간이, `대왕께 아룁니다. 이제 막 대왕께서 이르신 비색 돛, 꼭두서니 깃발의 범선이 이곳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보고하였을 터이고, 보고를 받은 수로왕이 `흐뭇하고 흐뭇해하시더라`는 표현이 `흔흔(欣欣:기뻐하고 기뻐하다)`의 두 글자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구간(九干) 등이 난요(蘭饒)를 갖추고, 계즙(桂楫)을 올려 심견(尋遣)케 하여, 이를 영(迎)하게 하시더라."

구간들로 하여금 난요(蘭饒).계즙(桂楫)이라 표현한 최고의 장식을 한 영접선(迎接船)을 타고가서, 유천간이 확인한 범선으로 그 배의 주인공을 모셔오라고 수로왕이 분부하였다는 것이다.

간(干)들이 호화 영접선을 몰고 곧바로 그 범선으로 가서, "뱃머리를 선(旋)하여 함께 입내(入內)코자 하였더니, 왕후(王后)께서 이르시기를 `나와 너희는 평생(平生)처음 만나는터인 즉, 어찌 경홀(輕忽)히 상수(相隨)하여 갈 수 있으리오` 하시더라."

구간들의 영접선이 범선까지 와서, 왕명을 받들어 함께 궁궐로 가기를 청하였더니, `왕후께서 곧 이르시기를(王后乃曰)`하고, 왕후라는 말이 나오는 <가락국기>의 서술이다.

   
 
  장유 화상이 아유타국에서 허황옥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오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가락문화제 시가 행진 장면)  
 

결국 바로 전에 있은 조알(朝謁)의 자리에서, 구간들이 청하고 수로왕이 언명한 천명(天命)의 왕후는 이날 아침에 맞춰, 가락국 왕도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수로왕뿐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 `천명(天命)`이라는 두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상이 생각해 내지 못한 일을 생각해 내고, 범상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이만이 천(天)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 경영(經營)을 알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 천명의 왕후의 전갈이 `생명부지인 너희들과 어떻게 함께 배를 타고 따라가는 경거를 할 수 있으리오`였던 것이다.

할일 없게 된 구간들은 호화영접선의 영접석을 비운 채. 궁궐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고, "유천(留天)등이 후지어(后之語)를 반달(返達)하니 왕(王)께서 `그러하리라`하시더라."이렇게 <가락국기>는 기록하는 것이다.

 
   

수로왕이 그 징표를 지시한 배를 발견한 유천간이, 이번에는 나머지 간들과 함께 호화영접선을 몰고 그 배에 접근하였더니. 난데없이 왕후의 영접선에 동승할 수 없다는 전갈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날 아침의 구간들의 곤혹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빈 배를 몰고 온 그들이 아뢰는말에 `왕께서 그러하리로다(王然之)`라고 <가락국기>가 적는 결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배를 발견하라 하였고,모시고 오라 한 것입니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반문하고 싶은 것이 구간들의 심정이었을 터이지만, 수로왕은 이들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유사(有司)를 솔(率)하여, 궐하(闕下)에서 서남(西南) 육십보(六十步) 허지(許地)에 동필하여, 산변(山邊)에 만전(慢殿)을 설(設)하여 지후(祗候)하셨더라."

구간들을 위시해서 가락국 왕성에 있는 관리들을 모두 이끈 수로왕은 왕성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으로 가서 산기슭에 장막을 친 행재소(行在所)를 마련하여 행차하셨더라고 <가락국기>는 기록하지만, 이 `60보(六十步)`는 불과 30m의 거리이므로, 분명히 잘못 새겼거나, 잘못 옮긴 것이다.

오늘날 김해 왕궁허(王宮墟)에서 약 3km 서남쪽인 흥동(興洞)의 당수나무 자리가 그 옛날 수로왕이 왕후를 기다리는 행재소의 자리였을 거고, 왕후의 행차(行次) 코스와도 부합된다.

"왕후(王后)께서 산외별포진두(山外別浦津頭)에 주(舟)를 유(維)하고 등륙(等陸)하시어 고교(高嶠)에서 게(憩)하실 제, 소착(所著)하신 능고(綾袴)를 해(解)하시어 산령(山靈)에게 유(遺)하시었더라."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상륙하시고, 높은 고개(高嶠)에서 잠시 쉬신 다음, 입으신 비단 바지(綾袴)를 벗어서 산신령(山靈)에게 폐백을 드렸다고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산외(山外)`는 `산너머`이므로, 가락국 왕성 남쪽에 길게 동으로 뻗는 장유산(長遊山) 줄기가 `산외`의 `산`이다.

그리고 `별항(別港)`과 같은 뜻인 `별포(別浦)`는 지금은 간척(干拓)한 땅이 된 `탑동(塔洞)` 일대로 볼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탑동에서 응달리(應達里)로 넘어 오는 고갯마루가 <대동지지>까지는 일컬어 온 `능현(綾峴)`일 것이다.

이 고갯마루에 서면, 북쪽 산기슭(흥동)에 마련된 왕의 행재소의 휘장을 확인 할 수 있었을 터이고, 왕후 일행은 그 행재소에 납신 수로왕의 행차를 확인하고, 또 수로왕이 이 고갯마루까지 사람을 시켜 보낸 비단바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리가 아니다. 그날 왕후는 이 고갯마루에서 속옷(바지)을 갈아 입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어째서 그토록 지체높은 신부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기만 했겠는가.

신랑측이 마련한 속옷을 갈아 입고, 초야(初夜)의 잠자리에 드는 풍습은 오늘 우리들의 혼례에는 없다.

하지만 급기야는 밝혀질 일이지마는, 검붉은 돛을단 범선을 타고 온 왕후는 이 고장에 정착한 사람과는 다른 먼 나라의 풍습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오늘날에도 많은 인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시행되는 인류 최고(最古) 최대의 성전(聖典)인 <베다(Veda)>에는 신부는 혼례식에 들기 전에 신랑측이 마련한 속옷을 갈아입고, 다음날 그 속옷에 묻은 출혈(出血)자국을 신랑측에 보여, 처녀성을 증명하도록 규범하고 있다(야쥴 베다).

"기지(其地)에서 시종(侍從)해 온 잉신이 이원(二員)이니, 명왈(名曰)하여 신보(申輔).조광(趙匡)이며 그 처(妻) 이인(二人)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 호(號)하고, 또한 노비(奴婢)가 계(計) 이십여구(二十餘口)이더라."

왕후일행에 대한 서술은 먼저, 왕실의 혼인에 수행해서 함께 지낼 신하 부부가 두 쌍이었다는 것을 이름과 함께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이 두 사람의 성(姓)이 신(申)씨며 조(趙)씨라 한 것은 처음부터 성인지, 후대에 와서 한자(漢字)로 성을 정했을 때의 것인지는 밝힐 길이 없다.

`모정(慕貞).모량(慕良)`도 그 이름의 뜻을 한자로 나타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내외 네 사람만이 아니라 시중들기 위해서 온 노비들의 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어려운 한자를 골라서 지참한 혼수(婚需)에 대해서도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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