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대통령 선거
영남매일·YN뉴스 기획특집
카메라고발
다시보는 부끄러운 김해 현장
KNN 100세시대 건강하이소
행복밥집 편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만평 구돌이선생
時도 아닌 것이
이슈단체 ㅡ 이슈인물
커뮤니티
(4)-나를 이곳에 강(降)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상태바
(4)-나를 이곳에 강(降)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5.18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였고 가락국 500년의 왕도였다. 시조인 김수로왕이 창건한 가락국은 10세(世)에 걸쳐 5백년 간의 사직을 보존하고, 수로왕이 물려준 그대로의 강토를 지켜왔으니 경계를 살펴보면 수로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황산(黃山.신라 국경), 서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백제국경), 남쪽으로는 남해이었으니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이 가락국이었다. -

 
   

"일천오백보(一千五百步)의 나성(羅城)을 주회(周廻)하고, 궁금전우(宮禁殿宇) 및 제유사(諸有司)의 옥우(屋宇)와 무고(武庫)와 창고(倉庫)의 땅을 축치(築置)하고, 환궁(還宮)하였느니라."수수께끼의 풍수를 풀이하면서 왕성(王城)의 자리를 정한 수로왕은, 궁전과 보좌하는 신하들이 들 집과 무기고(武器庫)와 창고가 들어설 땅의 외곽에 둘레 일천오백보의 외성(外城)을 쌓은 다음에 가궁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이 때 쌓은 외성의 길이 단위인 `보(步)`는 주척(周尺)의 단위로도 쓰이지만 보통 어른들의 한 발길이(50~60cm)를 말하기도 했다. 또 뒤에 나오는 기사에도 이 보(步)가 나오는데, 현재의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이 때의 보는 역시 사람의 한 걸음의 길이로 볼 수 있다.

 
   

결국, 수로왕의 장차 왕성의 제 시설을 세울 바깥 둘레의 성을 쌓고 돌아왔는데 그 둘레가 900m 남짓한 소규모의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숨에 축성을 마친 양으로 해석되는 문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외성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김해의 육지 사정이 여뀌잎처럼 좁았다는 데도 말미암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쌓은 성 안의 제 시설을 본궁(本宮)이라 하였고, 6년 뒤에 중궁(中宮)이 건설되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1km에 못미치는 성이라도 돌로 쌓으려면 큰 공사였을 것이고, 그 흔적은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났다 해도 무엇인가 흔적이 있을텐데, 지금 그 본궁의 유허지에 성곽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에는 원본 <가락국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가락고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토성......증토축성 지금유지상존(土城......蒸土築城 至今遺地尙存)`즉 이 기록에서 <가락국기>가 정리된 고려 문종(文宗, 1047~1083) 때만 해도 왕성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증토(蒸土)`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증토(蒸土)란 무엇인가? 오늘의 사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이 말은 그 글자의 뜻이 `찐 흙`, 즉 흙을 쪄서 단단하게 한 흙벽돌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찐다는 것은 김 올린다는 말이고, 따라서 물기를 말린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건조시킨 흙벽돌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을 수로왕이 위치를 정한 데 따라 척척 쌓아올린 작업을 한 것으로 생각해 본다.

왕성의 남쪽 경계인 회현리 패총에서 쌀이 나온 것처럼,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의 흙벽돌과 같은 흙벽돌이 수로왕이 건설한 가락국 외성의 건설 자재로 쓰여졌다 해도 엉뚱한 상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쌓은 외성 속에 가락국 본궁의 궁전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국내(國內)의 정장인부(丁壯人夫)와 공장(工匠)을 편징하여, 기월(其月) 이십일에 금양(金陽)을 자시(資始)하고, 삼십일에 기하여 역필(役畢)하였느니라. 그 궁궐옥사(宮闕屋舍)는 농격을 기다려 이를 작(作)하고, 그 해 시월에 경시(經始)하여 다음 갑진(甲辰) 2월에 성(成)하였느니라."즉 마무리 짖고, 농번기를 피한 다음, 12월부터 다음해 4월에 걸쳐 궁궐을 건축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로왕 즉위 3년의 2월, 새 왕궁에서 왕은 이제 본격적인 나라 살림 꾸리기에 착수하게 된다.

"길진(吉辰)을 연(涓)하여 신궁(新宮)에 어(御)하고, 만기(萬機)를 다스리고 서무(庶務)에 금면할 새, 홀연히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하여 달이 차 생란(生卵)하여 사람으로 화(化)한, 탈해(脫解)라 명(名)한 이가 해(海)로부터 왔느니라."그야말로 불청객이 바다를 따라 찾아왔는데, 그 인물의 이름이 신라(新羅)의 제4대왕이 된 탈해(脫解)였다는 것이다.

 
   

탈해왕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는 물론 <삼국사기>에도 자세히 나오는데, 출생이 그의 모(母) 함달왕 부인(含達王夫人)이 낳은 알(卵)이었다는데도 일치한다. 이 난생에 관해서는 접어두고서라도, 우선 그의 생국(生國)인 `완하국(琓夏國)`은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이 `완하국`은 가락국과 마찬가지로 `용성국(龍城國)` `다바나국(多婆那國)`등의 이칭이 있는데, 그 소재는 왜(倭)의 동북(東北)-천리라는 데는 일치한다.

즉 탈해왕의 출생국은 3세기에 통일된 왜국(倭國)의 왕도(王都)이건만, 아직도 그 소재지를 정립하지 못하고 혼미를 거듭하는 일본국의 고대사(古代史)에도 중요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이 생국인 `다바나(龍城國)`를 확정하면 그 곳에서 남쪽으로 천리(약750km)에 고대 왜국의 왕도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 지역 고대사 문제의 인물 탈해는 가락국 왕국의 낙성을 치하하러 온 축하객은 아니었을 것이다.

"열언(悅焉)히 예궐(詣闕)하여 왕(王)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왕위(王位)를 탈(奪)하려고 왔노라` 하였으니 왕(王)이 답(答)하여 이르된 `천명(天命)이 나로 하여금 즉위(卽位)케 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안중(安中)하고 백성을 수하(綏下)케 하였으니, 감(敢)히 천(天)의 명(命)을 어기어 위(位)를 여(與)하고, 또한 나의 국민(國民)을 너에게 부촉(付囑)시킬 수 있으리오` 하였느니라. 탈해(脫解)가 이르되 `그렇다면, 술(術)로써 겨뤄봄이 어떤가` 하기에 왕(王)이 `가(可)하다` 하였느니라."`열언(悅焉)`이란 말을 기쁘고 흐뭇하다는 뜻인데, 멀쩡하게 남이 공들여 세운 나라, 그 궁전에 불청객이 들어온 형용으로는 엉뚱하다. 결국, 왕위를 앗으려 왔다고 공언한 탈해는, 왕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왕이 받아들여 새로 지은 궁궐안은 두 위장부(偉丈夫)의 결투장이 되는 것이다.

"잠깐 새에 탈해(脫解)가 화(化)해성 응(鷹)이 되자, 왕(王)은 화(化)해서 취(鷲)가 되고, 또한 탈해(脫解)가 화(化)해서 작(雀)이 되자, 왕은 화(化)해서 전이 되는데 이 겨를에 촌음(寸陰)조차 낄 새가 없었더라. 탈해가 본신(本身)으로 환(還)하고, 왕이 또한 그러하자 탈해(脫解)가 복응(伏膺)하여 이르기를, `제가 각술(角術)의 장에서 응(鷹)에 취(鷲), 작(雀)에 전(?)하였거늘 죽음을 면(免)하였으니, 이는 모름지기 성인(聖人)이 죽음을 미워하는 인(仁)의 소치이옵나니 저와 왕은 위(位)를 겨룰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 자리에서 배(排)하고 물러갔느니라."매(鷹)에 대하여는 수리(鷲)로, 참새에 대해서 송골매로 화신의 술수 시합은 눈 깜짝할 새에 승패가 결정났다고 <가락국기>는 적고 있으며, 결국 마땅히 죽임을 당할 수 있었는데도 풀려난 탈해가 왕의 어짐을 치하하고 적수가 아님을 선언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이 수수께끼 술수 시합의 막이 내린다.

그러고 보면, 탈해가 기쁘고 흐뭇하게 궁에 들어왔다는 것도 어딘가 옛사람들의 속 깊은 거동의 일단으로도 느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탈해는 다된 가락국 왕궁을 결단내러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건국주(建國主) 수로왕이 그 정신적 지도 역량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격투기에 있어서도 천하장사(天下壯士)의 위에 있었음을 그날 구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증명해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 사후 6백년만에 수장한 뼈를 추리는 기록이 있는데, 그 때 천하장사의 골격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 탈해가 가락국의 영역에서 퇴출하는 장면을 기록한 다음의 구절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인교(隣郊)의 외도두(外渡頭)에 이르자, 바야흐로 중조(中朝)에서 내박(來泊)하는 수도(水道)를 따라 가더라. 왕이 몰래 체류(滯留)하여 모란(謀亂)할 것을 염려하여 급(急)히 주사(舟師), 오백소를 발(發)해서 이를 쫓았더니 탈해(脫解)는 계림계(鷄林界)로 범입하였느니라."결국 탈해가 신라 영역쪽으로 바삐 달아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가락국이 대해운국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즉 왕성 가까운 교회에서 탈해는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곳을 `외도두(外渡頭)`라 하였다. 도두(渡頭)는 나루, 곧 항구를 뜻하는데, `외(外)`를 붙였으므로 먼 해역을 내왕하는 항구, 즉 외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락국의 이 외항에는 중국(中國)을 드나드는 배가 정박하는 항구였음도 알 수 있다.

이 외도두와 수로왕이 추격시킨 수군(水軍^水師)의 배가 5백 척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하고, 중국의 사서 <삼국지> 등의 증언을 아우를 때, 가락국은 한반도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대륙과 일본 열도에 걸친 거대한 항행권(航行圈)을 가진 대해운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조 숙종(肅宗)때의 우의정을 지낸 허 목(許穆)선생의 <가락국기>의 허두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이다.

`가락자 신라남경 해상별국(駕洛者 新羅南境 海上別國:가락은 신라 남쪽의 바다 위의 별국)`가락국을 가리켜 육지의 영역보다는 바다를 판도로 하는 특수한 나라였다고 당시의 우의정이 증언한 데는 확고한 증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렵이 전통적으로 바다를 싫어하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심했고, 따라서 바다를 생계로 삼는 이들을 천대시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해상별국(海上別國)`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더욱 크지 않을 수 없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한 근세의 영국인들의 슬로건은 그 시대로서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런 시대보다 아득히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에 이 지역의 바다를 지배하고 그 해상권을 장악했던 가락왕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 역사를 오늘 속에 살려내는 일은 비단 가락왕손(駕洛王孫)들만의 영광이 아님을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건무(建武) 이십년 무신(戊申) 칠월 이십칠일에 속(屬)하였느니라."어떻게 보면, 왕위(王位)를 뺏으러 온 것이 아니라 신궁(新宮) 낙성에 한판승부를 벌여 수로왕의 힘을 구간들 앞에 보이러 온 것처럼 결말을 낸 탈해(脫解)의 둔주(遁走)로 수로왕의 건국기의 서술을 끝낸 <가락국기>는 `건무이십사년무신(建武二十四年戊申)`이라는 연호를 앞세워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서술하게 된다.

이른바 전설(傳說)이냐 사실(事實)이냐는 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 특정한 시일을 밝히고 있느냐 없는냐에 있음은 상식이자 원칙이기도 하다.

즉 `옛날 옛적, 어느 곳에`로 시작하면 그 이야기는 영락없이 옛 이야기가 되고, 세계사의 기준이 되는 연호(年號)나 특정한 시간의 표시를 밝히고 그 장소가 오늘의 주민들이 알고 있는 곳이면, 우선은 역사(歷史)의 서술이 된다는 것이다.

<가락국기>의 수로왕 강탄(降誕)의 경위 서술이 얼핏 보면, 종래의 일본인 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황당무계한 전설처럼 보이고, 요즘 학자들간에서 건국신화(神話)로만 취급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수로왕의 출자(出自)가 그 고대에 있어서 신성(神聖)한 혈통에 말미암았고, 크게 다스릴 능력이 없는 구간들이 각자의 무리를 이끌어 살고 있던 터전 위에 군림할 만한 능력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신화의 너울을 입혀서 연출한 영왕(迎王)의 의식(儀式)이었음은 앞에서 낱낱이 살펴본 바와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의식은 정확한 연대(年代)와 날짜를 기록하고 있고, 그 사건의 무대가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고 살고 있는 특정한 지역에서 집행되었다는 점에서 전설이나 신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다시 한번 집고 난 다음, 이제 그 건무(建武) 16년으로부터 6년 후인 건무 24년(서기 48년)이라는 연호를 밝히고 시작하는 <가락국기>의 서술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구간(九干)등이 조알지차(朝謁之次)에 헌언(獻言)하여 아뢰된 `대왕께서 강령(降靈)하신 이래로 아직 호구(好仇)를 얻지 못하였사오니, 청(請) 컨대 신(臣)등이 가진 처녀(處女)의 절호(絶好)한 자(者)를 궁궐로 선입(選入)하여 항려(伉儷)로 삼으소서`라 하더라."천강(天降)의 의식을 거쳐 저들 위에 군림한 대왕이 아직 배필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긴 구간들이 이날 아침 대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마당에서, 저들의 피붙이 가운데서 간택해서 왕후를 삼아달라고 품의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해 7월 27일의 일이었다고 날짜까지 밝히고 있지마는 이 날짜는 음력이다.

수로왕 출현 당시의 연령을 15세로 치면, 때는 이미 21세의 청년왕이다. 그러므로 그 왕의 왕후를 저들의 혈족에서 간택해야만 한다는 것은 구간들이 오랜 동안 합의해 온 일이었들 것이다.

구간들의 청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결혼 당사자인 수로왕의 처지를 저들과는 상반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 눈에는 신화(神話)로만 여겨질 만큼 뛰어난 통치술로 무력(武力)을 빌리지 않고 이 지역의 통치자가 된 수로왕이다. 그 신성의 통치권자가 피통치자의 가문에서 왕후를 맞는다는 것은 그 신성에 금이 갈 수 있는 일이 었으므로 벌써 그렇게 해야 할 일이었는데도 오늘 까지 미뤄온 수로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께서 이르시되 `짐(朕)이 이곳에 강(降)하였음은 천명(天命)이었듯이. 짐에게 배(配)하여 후(后)를 이룸에도 또한 천(天)의 명(命)이 있으리니, 경(卿)등은 염려하지 말라` 하셨더라니라."원문(原文)으로 스무 자에 불과한 왕의 대답이 <가락국기>에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스무 자의 한문에 담긴 뜻은 무한하리 만큼 깊은 것이 있음를 느낄 수 있었다.

첫째로 왕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작위(作爲)가 아닌 천명(天命)이었음을 6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한번 구간들에게 깊이 인지 시키려는 왕의 통치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염려할 바 아니다`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날이야말로 천명의 왕이 어떻게 범상(凡常)과는 다른가를 분명히 보일 준비가 완료됐다는 신호로 생각 할 수 있다.

범상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생각해 내고, 그것을 탁월한 능력과 빈틈없고 착실한 영위(營爲)로 성취해 내는 일. 그렇게 해서 이룬 일이 바로 범상의 눈에는 신화로 보이고, 그 탁월한 힘이 없었던 것으로 뭉개버려야 하는 편에서 보면 `전설`, 더 심하게 `꾸며낸 이야기`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나를 이곳에 강하게 하심이 하늘의 분부였듯이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이루게 함에도 또한 하늘의 분부가 있으리니 너희들이 걱정할 바 아니다!`라고 잘라서 말한 수로왕은 숨돌릴 새도 없이 구간들에게 당장 거행할 저들의 소임을 일러주게 된다.

"마침내 유천간(留天干)에 명(命)하여 경주(輕舟)를 밀고 준마(駿馬)를 지(持)하여 망산도(望山島)에 이르러 입대(立待)하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 명하여 승점(乘岾)에 취(就)하게 하시더라."유천간(留天干)은 구간의 한 사람이다. 그 유천간이 경주(輕舟:근거리, 수심이 얕은 곳에 쓰는 배)와 발이 빠른 말을 함께 가지고 입대(立待:망을 보는 일)시킨 곳은 `망산도`라 기록했는데, 그런 섬은 지금은 이름조차 남지 않고 있다. 신귀간(神鬼干)을 보냈다는 `승점(乘岾)`이란 지명도 마찬가지다. 다만 <가락국기>에는 이 두 지점의 소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망산도(望山島)는 경남(京南)의 도여이니라. 승점(乘岾)은 연하국(輦下國)이니라."`경남(京南)`은 경도(京都)의 남쪽으로 곧 왕궁 바로 남쪽을 가리키며, `연하국(輦下國)`이란 기내(畿內)에 있는 한 고을로 왕궁에서 가깝지는 않아도 인접한 지역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옛날 강바닥이었던 곳이 넓은 평야가 되어 김해평야(金海平野)로 이름을 바꾼 이 지역이지만 오늘 우리들이 가장 신빙할 수 있는 한국지도인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 김해편에는 적어도 1864년(고종 원년, 김정호가 이 책을 완성한 해로 추정)까지만 해도, 망산도는 `전산도(前山島)`라는 이름으로 김해부(金海府)에서 5리 남쪽 강 위에 섬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산도, 일운망산도, 남오리(前山島, 一云望山島, 南五里)` 그리고, `망산도성, 본부사책성(望山島城, 本府使策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망산도는 왕궁에서 2km(5리)쯤 남쪽에 있는 섬이며, 이곳이 옛부터 왕궁 남쪽을 망을 보는 초소나 그 시설이 있었으므로 후대에 와서 성을 쌓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남오리(南五里)`에 상응하는 거리에 분명히 망산도는 오늘날 칠산(七山)이라는 이름의 김해평양에 우뚝한 산봉우리임이 분명하다.

이렇듯이 왕성에서 아주 가까운 섬 위 초소에서 망을 보러 가는 유천간이 배와 함께 말을 가지고 간 것은 그가 지켜보고 왕에게 알릴 일이, 긴급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천간이 망산도 초소에서 망을 보고 있으려니까, "홀연히 해(海)의 서남우(西南隅)로부터 비범(緋帆)을 궤하고, 천기를 장(張)한 배가 북(北)을 지(指)하였더라. 유천(留天) 등이 먼저 도상(島上)에서 화(火)를 거(擧)하고, 당장 다투어 도(渡)하여 하륙(下陸)하고 분주히 오고 신귀(神鬼)는 이를 망(望)하였느니라." 이 대목의 <가락국기> 읽기가 까다로운 것은 일연(一然)선사가 원본(原本)에서 추려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망산도에 오른 유천간은 앞바다(낙동강 하구)의 서남(西南) 귀퉁이 쪽에서 북을 향해서 오는 범선(帆船)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범선의 돛은 비색(緋色:검붉은 빛)이며 역시 꼭두서니로 물들인 진홍빛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천간은 시각을 다투어 배를 타고 뭍으로 와서는 매어 뒀던 말을 바꿔 타고 달려오고, 승점(乘岾)에 간 신귀간은 유천간이 올린 불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가락국기>는 적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기록이 또 있다. 그것은 유천간이 승점에 간 신귀간에게는 봉화를 올려 그 도착을 알리고 왕궁에서 기다리는 왕에게는 직접 상주(上奏)하러 배와 말을 바꾸어 달리게 한 그 비범천기의 배는 약속의 배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이날 망산도로 유천간을 보내면서, `그곳에서 앞바다 서남쪽에서 북을 향해서 항진해 오는 비색(緋色)의 돛에 꼭두서니빛의 깃발을 단 범선(帆船)을 발견하는 즉시 봉화를 올려라. 그리고 승점에서 망산도의 봉화를 보는 대로 신귀간은 이런 이런 준비를 하여라`고 일렀을 것이다.

스무 자의 한문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가 비색의 돛을 달고, 꼭두서니 빛의 깃발을 올린 것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그 배의 선적(船籍)과 그 배를 탄 이의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도 <가락국기>는 역대 사학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확한 사실(事實)의 기록임을 차차 알게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