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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도와 나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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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도와 나라 만들기
  • 조유식취재본부장
  • 승인 2011.05.05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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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가락국의 탄생
   
 
  가락루 앞에 있는 홍살문.  
 

"그달 보름(望日)에 즉위(卽位)하였느니라. 시현(始現)한 고(故)로 수로(首露)라 위하고, 국칭(國稱)하기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칭(稱)하였느니라"

이렇게 기록된다.

서기 42년, 음력으로 3월 15일 마침내 천강의 의식을 거쳐 구간 위에 군림한 대왕은 대가락국(大駕洛國)을 건국하고 그 건국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비로소 나타났다기에 `수로(首露)`라 하였다는 말은, `목 수(首)`는 시작을 나타내므로 `나타날 로(露)`와 합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낙동강 하구, 김해를 도읍지로 탄생한 한반도 네번째 고대왕국의 국호(國號)는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耶)`라 불렀다고 한다. `가락`, `가라`, `가야`는 비슷한 음으로 그 당시의 말로 다른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음을 한자로 나타내게 되었을 때, 수로왕의 후손들은 `가락`이라는 무게가 있는 글자를 빌렸고, 반대로 이 왕국을 왕국으로 대접할 입장이 못된 사가(史家)들은 가야(伽耶)에다 부족(部族)이나 연맹(聯盟)등을 붙여 기록하게 된 것이다.

 
   

심한 예로 3세기에 정리된 중국의 사서인,삼국지(三國志)에는 `구야(拘邪)`라는 글자로 가락국을 표기하고 있다.

뜻으로 새긴다면 `개처럼 나쁜`으로 되는데, 그 당시 중국인들이 큰 바다를 건너 왜(倭)로 갈 때는 가락국에 들려야만, 선편(船便)을 얻을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 사서인<삼국지>는 가락국의 영토를 알아보는 데 귀중한 증언도 담고 있다.

ㆍ대해운국(大海運國) 대가락국

이제 <가락국기>는 가락국의 영토에 대해서 언급하게 된다.

"동(東)은 황산강(黃山江)으로써, 서남(西南)은 창해(滄海)로써, 서북(西北)은 지리산(地異山)으로써, 동북(東北)은 가야산(伽耶山)으로써 남으로 해서 국미(國尾)로 하였느니라"

`황산강(黃山江)`은 낙동강의 옛 이름이다.

낙동강을 가락국의 동쪽 경계로 삼고, 서남쪽은 `창해(滄海)`, 즉 큰 바다까지이며, 서북쪽은 `지리산(地異山)` 곧 지리산(智異山)이며, 동북쪽은 오늘의 이름과 다름이 없는 `가야산(伽耶山)`을 나라의 경계, 즉 국미(國尾)로 삼았다는 것은 오늘의 지리조건과 일치한다.

문제는 남쪽 경계에 대한 사실이다.

`남이위국미(南而僞國尾)` 이렇게 적고 있는 원문을 그대로 읽는다면 `남쪽 그리고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가 된다.

분명히 이것은 `남○○이위국미(南○○而僞國尾, 남쪽은○○라는 곳으로 해서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에서 남쪽 경계가 된 지명을 빠뜨렸거나 빼버린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는 원본이 아니다. 저자인 일연선사가 김해로 가서 그곳에 있었던 원본에서 추려서 옮긴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이 옮기는 과정에서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지명이 사라진 것이다.

   
 
  궁에서 바라본 분성산 정상.  
 

사라진 가락국의 남쪽 경계는 어디였을까? 우선 떠오르는 곳이 오늘의 쓰시마(對馬)섬이다.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가 수록하여 대대로 전해오는 <편년가락국기(編年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구보(舊譜)를 안(按)컨대, 좌지왕무신(坐知王戊申)에 왜(倭)가 대마도(對馬島)에 영(營)을 비로소 치(置)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실지(失地)하여 가락(駕洛)과 신라(新羅), 이방(二邦)의 우(憂)가 된다"

좌지와(坐知王)은 가락국의 6대 왕이며, 그 무신(戊申)은 서기 408년이다.

이 왕 때 가락국은 쓰시마(對馬) 섬을 실지(失地)하였고, 왜(倭)는 비로소 병영(兵營)을 두었다고 한 것은, 서기 408년 전까지는 쓰시마섬이 가락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가락과 신라, 두 나라의 근심이 되었다`라는 증언도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즉 신라 실성왕(實聖王)은 이듬해인 409년 봄에, 쓰시마 섬을 가락국이 실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쓰시마에다 신라의 병영을 설치하기 위해서 침공할 논의를 한 사실을 적고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ㆍ實聖王 七年). 뿐만 아니라 가락국을 `구사(拘邪)`라고 표기한 중국 사기 <삼국지>의 `왜인(倭人)`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역한국사남사동 지기북안구사한국(歷韓國乍南乍東 到其北岸拘邪韓國:한국을 남으로 동으로 꺾어가다가 그 북쪽 기슭인 가락국에 다다른다)`.

중국의 대방군(帶方郡)에서 왜국(倭國)으로 가는 사신의 코스를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가락국을 `그 북쪽 기슭`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남쪽 기슭`은 어디일까? 쓰시마 섬은 이미 분명해졌다. 하지만 그 섬보다 더 남쪽에 가락국의 `남쪽 기슭(南岸)`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불청객으로 들어온 탈해(脫解)를 쫓기 위해서 수로왕이 급히 발진시킨 수군의 배가 오백 척이었다고 <가락국기>는 적고 있다.

이 오백척이라는 수량의 표기는 그 때의 인구가 칠만 오천 명이었다는 기록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가락국은 육상의 영토만이 아니라 큰 바다를 영토로 삼아 이 지역의 문물의 유통에 공헌한 대해운국(大海運國)이었을 것이다.

"가궁(假宮)을 창(創)하게 하여 입어(入御)하심에 오직 질검(質儉)함을 요(要)할뿐이었으니, 모자(茅茨)는 자르지 아니하고, 토계(土階)는 삼척(三尺)이었느니라"

   
 
  회현동 패총.  
 

왕은 우선 들 궁(宮)을 짓게 했는데, 석자쯤 높이로 돋운 땅에다 지은 단칸집에 이은 이엉 끝조차 고르지 않는 것이었다고, 건국주의 검소하였음을 <가락국기>는 밝히고 있다.

수로왕 출현 당시의 나이가 15세쯤이었다는 그 15세를 오늘의 15세의 소년에 견줄수는 없다. 이를테면 `기인장용 소년유축실작력자(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이런 기록이 <삼국지>보다 앞서 편찬된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後漢書)>의 `한(韓)`에 대한 대목에 보인다.

한(韓)이란,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그 한인(韓人)들은 `장한고 용맹스럽고, 소년으로 집을 짓는데 일을 하는 사람들은....`이라 하여 그 무렵 이 지역의 연소자들의 능력과 기질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오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험한 생활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지혜와 힘을 다한 고대의 일이다.

독립하는 연령은 지금보다 빨랐을 터이고, 그 가운데도 출중한 분이 수로왕이었다. 그러므로 `그 용모가 뛰어나게 훌륭했다`라는 옛 기록의 증언은 애오라지 외견상의 얼굴 생김새만 아니라, 엄격한 자기 수련을 거듭한 소년의 강하고 수려한 인상을 표한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년(二年) 계묘춘정월(癸卯春正月), 왕께서 이르시기를 짐(朕)은 경도(京都)를 정치(定置)코자 하노라 하시고, 곧 가궁(假宮)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으로 가행(駕行)하셨느니라"

수로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비로소 왕도(王都)를 건설하기로 나선 것이다.

그래서 가궁의 남쪽에 있는 `신답평(新沓坪)`으로 나섰다. 지금 김해시 회현동 패총과 봉황대 기슭의 평지를 이곳에서는 `논실`이라 하고 있다.

논은 곧 답 (沓)이고 심은 평(坪)이라는 한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가락국기>는 이 신답평을 `옛부터 못쓰던 땅인 것을 새로 경작지로 일궜기에 붙인 이름`이라 주석한 것을 보면, 수로왕은 갯벌이던 이 곳을 개간해서 땅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성(王城)을 마련할 땅을 새로 간척(干拓)한 것이다.

이곳에 행차하신 왕은 "산악(山嶽)을 사망(四望)하며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 땅이 협소(狹小)하기 요엽(寥葉)과 같으나, 수이(秀異)하여 가(可)히 십육 나한(十六羅漢)의 주지(住地)이니라. 항차 일(一)에서 삼(三)을 성(成)하고, 삼(三)에서 칠(七)을 성(成)하여 칠성(七聖)의 주지(住地)가 분명히 이에 합치나니, 땅을 탁(托)하고 개강(開彊)하면 마침내는 넉넉함을 거두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가락국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새로 일군 땅, 논실에서 사방의 산들을 바라보며, 수행한 신하들에게 한 말은 오늘 우리로서는 수수께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우선, 우뚝 솟은 분성산(盆城山) 아래 자리잡은 김해시가는 작은 분지이기는 하나 좁다란 여뀌 잎처럼 생기지 않았다.

둘째로 `16나한(羅漢)`이란 석가의 분부를 받아 일정한 기간을 세상에 나타나 정법(正法)을 호지(護持)하는 16존자(尊者)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수로왕 즉위 당시 불법(佛法^正法)이 이 땅에 들어와 있었다는 역사의 뒷받침이 없다.

그러나 우선 철종(哲宗) 12년(1861)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만 봐도 김해시가 깊숙이 물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도에 `망산(望山)`이라 표시된 섬은 오늘날 김해평야속에 솟은 `칠산(七山)`이라는 산으로 둔갑하고 있는 지역이니, 수로왕 당시는 물이 더 많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 궁허비(宮墟碑)가 있는 회현동 일대는 바로 물가였음이 분명하다.

16나한도 마찬가지다. 석가는 불교로 사람들의 바른 생활을 가르칠 때, 불교 이전의 신앙 가운데 좋은 것은 버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삶의 바른 길을 지키는 16존자`가 불교 이전에도 있었고, 그 믿음의 존자를 대해운국의 건국주 수로왕이 알고 있을 수도 있을 만한 일이다.

`일(一)에서 삼(三), 삼(三)에서 칠(七)`은 얼핏 고대 중국의 풍수설을 연상하게 하지만, 중국의 것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오(五)를 기준으로 삼는데, 수로왕의 풍수설은 칠(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 칠성(七聖)은 오늘 우리 한국 절에만 볼 수 있는 칠성각(七星閣)의 주인공으로 절과 절을 찾는 신도를 지키는 분이며, 이 `칠성(七星)`이 `칠성(七聖)` 신앙을 이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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