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사충단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넷 의병장 김득기ㆍ송빈ㆍ유식ㆍ이대형 선생의 공을 기리고 있는 묘단(廟壇)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성의 주장군이었던 서례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들 네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한 곳이다, 이것이 임진의병의 시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년 만인 선조 33년(1600)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숙종 34년(1708) 지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담사' 와 '송담서원' 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가 순조 33년(1833)에 '표충사' 라 이름 지었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단을 설치하여 '사충단' 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일로 정하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비각 이외에는 모두 새로 지은 것들로 비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규모에 옆에서 보아 사람 인(人)자의 선을 그리는 맞배지붕을 올리고 있다. 그 안에 모셔둔 표충단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에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사충단은 처음에 김해시 동상동 881-11번지(포교당 앞)에 있었던 것을 동상동 227-6, 8번지로 강제 이전 됐다가 구획정리에 의한 택지개발로 현재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으로 이전되었다.
이전 이후 외형상은 문화유적지 답게 수로왕능, 구지봉, 허황후능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내실은 그러하지 않다.
본지가 지난 12월14일자로 지적한 바 있는 사충단은 관리부실의 표본이었다.
새해 해맞이 행사차 시민들이 분성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사충단에 아이들과 함께 들렸던 시민의 제보를 받아 다시 찾아가 보았다.
지난번 보도후 정비가 되었으리라 믿고 찾아간 사충단은 정비는 고사하고 완전히 쓰레기장으로 잡동산이 창고로 변해있었다.
사진으로 보는바와 같이 목조건물 벽에는 나무장작 더미가 사람 키 보다 높게 쌓여져 있어 기둥이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마루에는 농기계가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고 모든 건물 뒤쪽은 어김없이 건축 폐자재와 일반 폐자재와 쓰레기들이 쌓여있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출입문 한켠은 아예 창고로 둔갑한지 오래고 여기저기 보기 흉한 조립식 건축물들이 안팎으로 1동식 자리하고 있어 목조건축과 대조를 이뤘다.
이에 각종 장비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여 한곳으로 모으고 낡아빠진 마루도 손질을 하여 비바람에도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함은 물론이고 사충단 관련한 문화행사와 사업개발로 시민들이 찾고 싶은 유적지 탐방 코스로 거듭날 수 있도록 대책이 필요하다고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