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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왕도 역사여행 -5- 허왕후 바다로부터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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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왕도 역사여행 -5- 허왕후 바다로부터 오다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23.08.24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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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闕)에 주(走)하여 이를 주(奏)하매, 상(上)께서 문(聞)하시고 흔흔(欣欣)하시더라."

궐(闕)은 궁궐이지마는 그 궁궐에 달려와 왕에게 아륀 사람이 탈락된 문장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연하국(輦下國)인 승점(乘岾)으로 간 신귀간이 아니라, 2km 남쪽 망산도로 빠른 말과 배를 가지고 간 유천간임이 분명하다.

달려온 유천간이, `대왕께 아룁니다. 이제 막 대왕께서 이르신 비색 돛, 꼭두서니 깃발의 범선이 이곳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보고하였을 터이고, 보고를 받은 수로왕이 `흐뭇하고 흐뭇해하시더라`는 표현이 `흔흔(欣欣:기뻐하고 기뻐하다)`의 두 글자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구간(九干) 등이 난요(蘭饒)를 갖추고, 계즙(桂楫)을 올려 심견(尋遣)케 하여, 이를 영(迎)하게 하시더라."

구간들로 하여금 난요(蘭饒).계즙(桂楫)이라 표현한 최고의 장식을 한 영접선(迎接船)을 타고가서, 유천간이 확인한 범선으로 그 배의 주인공을 모셔오라고 수로왕이 분부하였다는 것이다.

간(干)들이 호화 영접선을 몰고 곧바로 그 범선으로 가서, "뱃머리를 선(旋)하여 함께 입내(入內)코자 하였더니, 왕후(王后)께서 이르시기를 `나와 너희는 평생(平生)처음 만나는터인 즉, 어찌 경홀(輕忽)히 상수(相隨)하여 갈 수 있으리오` 하시더라."

결국 바로 전에 있은 조알(朝謁)의 자리에서, 구간들이 청하고 수로왕이 언명한 천명(天命)의 왕후는 이날 아침에 맞춰, 가락국 왕도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은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수로왕뿐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 `천명(天命)`이라는 두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상이 생각해 내지 못한 일을 생각해 내고, 범상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이만이 천(天)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 경영(經營)을 알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 천명의 왕후의 전갈이 `생명부지인 너희들과 어떻게 함께 배를 타고 따라가는 경거를 할 수 있으리오`였던 것이다.

할일 없게 된 구간들은 호화영접선의 영접석을 비운 채 궁궐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빈 배를 몰고 온 그들이 아뢰는말에 `왕께서 그러하리로다(王然之)`라고 '가락국기'가 적는 결말이 된 것이다.

구간들을 위시해서 가락국 왕성에 있는 관리들을 모두 이끈 수로왕은 왕성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기슭에 장막을 친 행재소(行在所)를 마련하여 행차하셨더라고 '가락국기'는 기록하고 있다.

"왕후(王后)께서 산외별포진두(山外別浦津頭)에 주(舟)를 유(維)하고 등륙(等陸)하시어 고교(高嶠)에서 게(憩)하실 제, 소착(所著)하신 능고(綾袴)를 해(解)하시어 산령(山靈)에게 유(遺)하시었더라."

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상륙하시고, 높은 고개(高嶠)에서 잠시 쉬신 다음, 입으신 비단 바지(綾袴)를 벗어서 산신령(山靈)에게 폐백을 드렸다고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산외(山外)`는 `산너머`이므로, 가락국 왕성 남쪽에 길게 동으로 뻗는 장유산(長遊山) 줄기가 `산외`의 `산`이다.

그리고 `별항(別港)`과 같은 뜻인 `별포(別浦)`는 지금은 간척(干拓)한 땅이 된 `탑동(塔洞)` 일대로 볼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탑동에서 응달리(應達里)로 넘어 오는 고갯마루가 '대동지지'까지는 일컬어 온 `능현(綾峴)`일 것이다.

이 고갯마루에 서면, 북쪽 산기슭(흥동)에 마련된 왕의 행재소의 휘장을 확인할 수 있었을 터이고, 왕후 일행은 그 행재소에 납신 수로왕의 행차를 확인하고, 또 수로왕이 이 고갯마루까지 사람을 시켜 보낸 비단바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날 왕후는 이 고갯마루에서 속옷(바지)을 갈아 입은 것이다. 신랑측이 마련한 속옷을 갈아 입고, 초야(初夜)의 잠자리에 드는 풍습은 오늘 우리들의 혼례에는 없다.

검붉은 돛을단 범선을 타고 온 왕후는 이 고장에 정착한 사람과는 다른 먼 나라의 풍습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오늘날에도 많은 인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시행되는 인류 최고(最古) 최대의 성전(聖典)인 '베다(Veda)'에는 신부는 혼례식에 들기 전에 신랑측이 마련한 속옷을 갈아입고, 다음날 그 속옷에 묻은 출혈(出血)자국을 신랑측에 보여, 처녀성을 증명하도록 규범하고 있다(야쥴 베다).

"기지(其地)에서 시종(侍從)해 온 잉신이 이원(二員)이니, 명왈(名曰)하여 신보(申輔).조광(趙匡)이며 그 처(妻) 이인(二人)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 호(號)하고, 또한 노비(奴婢)가 계(計) 이십여구(二十餘口)이더라."

왕후 일행에 대한 서술은 먼저, 왕실의 혼인에 수행해서 함께 지낼 신하 부부가 두 쌍이었다는 것을 이름과 함께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이 두 사람의 성(姓)이 신(申)씨며 조(趙)씨라 한 것은 처음부터 성인지, 후대에 와서 한자(漢字)로 성을 정했을 때의 것인지는 밝힐 길이 없다.

`모정(慕貞)ㆍ모량(慕良)`도 그 이름의 뜻을 한자로 나타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내외 네 사람만이 아니라 시중들기 위해서 온 노비들의 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어려운 한자를 골라서 지참한 혼수(婚需)에 대해서도 '가락국기'는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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