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은혜를 입고 살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 임진왜란 때 김해를 지킨 충신 4인방 사충신
1592년,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일본은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59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온 나라가 왜군의 말발굽 아래 신음할 때,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김해에서도 왜군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던진 의로운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김해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송빈(宋賓·1542~1592), 김득기(金得器·1549~1592), 이대형(李大亨·1543~1592), 류식(柳湜·1552~1592)은 왜란 중 조선 최초로 일어난 의병장으로 그 이름과 충절이 전해져오고 있다. 김해에는 그들의 공을 기리는 사충단(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동상동 소재)이 있다.
왜란 중 최초로 일어선 의병장들
"네 사람이 한마음으로 싸우자"
죽음으로 김해성 사수 결의 왜군 호계천 상류 막아 식수 차단
류식이 객관 앞 땅 파 샘물 치솟아 투항 권하는 왜장 되레 꾸짖어
파죽지세 공격속에서도 기세 등등
성 함락 때까지 결사항전 후 순절
우리나라의 남해안 지방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에 비변사(조선시대 군사업무와 주요 정책을 맡아보던 기관)를 설치, 국방을 강화했다.
그러나 선조 때에 이르러 지배계급이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고 반목하는 바람에 국방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륙 진출을 꿈꾼 일본의 야심,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 등 동양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책이 미흡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일본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여겨 1590년 통신사를 파견했으나,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서로 다른 내용의 동향보고를 올렸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지속된 가운데,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을 가며 허둥댔지만, 이 땅의 백성들은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한 왜장 구로다의 5천, 오모토모의 6천, 모리의 2천 등 1만 3천여 명의 왜군이 부산 다대포를 지나 김해로 진격해 왔다. 송빈은 이대형과 함께 장정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무과급제자인 김득기와 류식이 의병을 이끌고 합류해 사기를 보탰다.
사충단 비각 안의 비석에는 사충신에게 추증된 직함이 새겨져 있으며, 표충사와 사충단은 동상동 분산에 있는 송담서원 가장 윗쪽에 있다.
이병태 전 김해문화원장(김해뉴스 18일자 '김해인물열전' 참조)은 <김해인물지>에 네 의병장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을 중심으로 김해성의 전투를 더듬어 본다.
송빈은 진영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담(松潭)이며, 중종 때 절제사를 지낸 송창의 아들이다. 김해부사 서례원(徐禮元)이 송빈에게 왜군의 침략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했다. 이미 나이가 오십에 이르렀으나, 송빈은 장남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송빈은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대형은 활천에서 태어났다. 부사 서례원과 인척간이었던 이대형은 함께 싸우겠다는 두 아들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송빈과 함께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득기는 부거인리(府居仁里. 현 외동)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향리로 돌아와 있던 그는 왜적이 김해성으로 쳐들어오자 비분강개하여 싸우기로 결심했다. 17살이었던 6대 독자 아들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만류했다. 김득기는 자신이 입던 도포 한 벌과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주며 결의를 보였다. 병중에 있던 아내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류식은 하동면 산선(蒜山. 현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서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용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과거공부를 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렸다. 세상의 혼탁함을 걱정하던 중 왜군이 월당진(月堂津.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류식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하고 집안 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갔다.
부사 서례원은 송빈에게 중군(中軍. 군의 가운데 있어 대장이 직접 통솔하는 부대)의 소임을, 김득기에게 동문의 수비를 맡겼다. 송빈은 밤을 틈타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나가 김해성을 포위한 왜적 수백명을 죽이고, 죽도(현 가락면)까지 추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바다에서 왜적의 군선이 대거 침략해 왔다. 김해성 턱 밑까지 몰려온 왜군은 성을 세겹으로 포위했다.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서문을 지키다 달아났고, 부사 서례원은 "외로운 성에 군사는 약하다"라며 강동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서례원은 이듬해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적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나, 부사가 달아나자 수세에 몰렸다. 부사가 진주로 떠난 이후 성에 들어온 류식은 송빈·이대형·김득기와 더불어 "주장인 김해부사(김해를 지킬 의무가 있는 최고 장수라는 의미)가 비록 떠나갔으나 우리 네 사람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며 김해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원군이 오지 않는 외로운 김해성을 지켰다.
왜군이 호계천(동상동과 부원동을 흐르는 시내.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사용된다) 상류를 막아 성 안에 물이 끊겼다. 성 안의 사람들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고 항복하자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류식이 이를 꾸짖고 객관 앞의 땅을 팠는데 샘물이 솟아났다. 그 물을 들어 왜군에게 보이니 왜군은 '신(神)과 같은 사람이 반드시 성 안에 있을 것이다'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자리(동상동 874번지)에는 후손들이 '류공정(류공의 우물)'비를 세웠다.
4월 19일 밤에 왜군은 허수아비를 무수히 만들어 성 안으로 던지고 군사들을 교란시키며 쳐들어 오려 했다. 성안에 남은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죽기살기로 싸웠다. 왜군은 김해 들판의 보리를 모두 베어 성 밑의 참호를 메우고 성벽과 동일한 높이로 쌓아올린 뒤 이를 밟고 성벽을 넘었다. 성 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왜적을 꾸짖으며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싸우다 순절했다.
송빈은 자신의 충절을 담은 순절시 한 편을 남겼다. 현대말로 풀어 다시 새겨보자.
"예부터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후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에 항복 하리오/ 힘은 다 하고 성은 외로우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먼저 두 적장을 베어 충성을 다 하리라/ 남의 절개 세울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자네들은 이제 스스로 헤아리기 바라네/ 나라에 보답하고자 순신(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림) 하기를 나는 이미 결심하였네/ 북쪽을 향하여 백 번 절하고 우리 임금님께 하직 하노라."
왜군이 김해성을 함락시킨 뒤, 송빈의 부하였던 양업손은 전사자들의 시체 가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왜군이 깊이 잠든 틈에 성을 빠져나온 양업손은 당시의 전투상황과 마지막까지 전투를 이끌었던 송빈 등 네 의병장의 순절 소식을 전했다. 이 일이 조정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도 알려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0년(선조 33)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 중에서 송빈은 이조참판, 이대형과 김득기는 호조참판, 유식은 이조참판으로 각각 추증됐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 '사충단'(四忠壇)과 송담서원
고종 명으로 묘단 건립…현재 서원 내에 복원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때 왜적을 맞아 김해성이 함락될 때까지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 등 사충신을 기리기 위해 1871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이다. 사충단이 처음 세워진 곳은 동상동 873 자리였다. 이후 1977년 김해시의 도시계획으로 동상동 277-6으로 이전되었다가, 1995년 현재의 장소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준공되면서 그 안에 사충단이 복원되었다.
동상동 분산 가는 길의 중턱에 위치해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우리가 사충단이라 알고 찾는 곳은 송담서원이고, 서원의 여러 건물들 중 네 충신을 기린 비석을 감싼 작은 비각이 사충단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이다. 비각 안에 사충신이 추증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담서원의 멋진 풍광에 눈이 팔려 가장 위에 세워진 사충단을 못보고 지나치는 관람객들도 종종 있다.
송담서원은 송빈의 공덕을 기릴 목적으로 1708년 주촌면 가곡에 세워진 표충사가 효시이다. 표충사는 1741년 훼철되었다가 1784년 지방 유림들의 표충사 재건 상소로 진례 무송에 복설되었다. 이때에 이덕형 김득기를 더하여 삼충신을 모시는 송담사가 되었다. 그 후 순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01년 철폐 되었다가 1824년 지방유림들의 복원 상소로 다시 복설되어 사호를 송담서원 송담사로 불리게 되었다 . 송담서원은 1833년 다시 표충사(충신을 모시는 사당)로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 후 1871년 지방 유림들의 건의를 받은 고종이 김해부사 정현석에게 표충사 건립을 명했다. 현재 송담서원에는 비각과 표충사가 가장 위부분에 위치해 있다. 표충사를 새로 건립할 때 류식도 함께 배향하여 사충신을 기리게 되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