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김해만들기시민포럼,영남매일 의병장사충신선양회 '의병기념관' 건립 촉구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김해 사충신(四忠臣),무명의병 선양 시민운동 추진
송빈(宋賓·1542~1592/진영 출생), 김득기(金得器·1549~1592/외동 출생)
이대형(李大亨·1543~1592/활천 출생), 류식(柳湜·1552~1592/대동 출생)
(사)김해사충신선양회와 함께 '사충신 의병기념관' 건립 촉구 시민 서명 운동 전개
“네 사람이 한마음으로 싸우자” 죽음으로 김해성 사수 결의 백성 1000여명 의병 참여
문화원장 번영회장 등 토착 인사들 특정인 재산 증식 위해 공작하여 역사 인물 말살 앞장
동상동 포교당 앞에 있던 문화재 사충각 지금의 분성산 중턱으로 이전 시민과 멀어져
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한 조선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 김득기(金得器), 이대형(李大亨), 류식(柳湜) 사충신(四忠臣) 충절을 기리는 '송담서원 사충신 향례(享禮)'가 매년 4월 20일(음력) 김해 사충단 표충회 주관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송빈은 진영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담(松潭)이며, 중종 때 절제사를 지낸 송창의 아들이다. 김해부사 서례원(徐禮元)이 송빈에게 왜군의 침략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했다. 이미 나이가 오십에 이르렀으나, 송빈은 장남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송빈은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대형은 활천에서 태어났다. 부사 서례원과 인척간이었던 이대형은 함께 싸우겠다는 두 아들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송빈과 함께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득기는 부거인리(府居仁里, 현 외동)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향리로 돌아와 있던 그는 왜적이 김해성으로 쳐들어오자 비분강개하여 싸우기로 결심했다. 17살이었던 6대 독자 아들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만류했다. 김득기는 자신이 입던 도포 한 벌과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주며 결의를 보였다. 병중에 있던 아내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류식은 하동면 산선(蒜山, 현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서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용의 손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과거공부를 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렸다. 세상의 혼탁함을 걱정하던 중 왜군이 월당진(月堂津.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류식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하고 집안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갔다.
부사 서례원은 송빈에게 중군(中軍, 군의 가운데 있어 대장이 직접 통솔하는 부대)의 소임을, 김득기에게 동문의 수비를 맡겼다. 송빈은 밤을 틈타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나가 김해성을 포위한 왜적 수백명을 죽이고, 죽도(현 가락면)까지 추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바다에서 왜적의 군선이 대거 침략해 왔다. 김해성 턱 밑까지 몰려온 왜군은 성을 세겹으로 포위했다.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서문을 지키다 달아났고, 부사 서례원은 "외로운 성에 군사는 약하다"라며 강동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서례원은 이듬해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적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나, 부사가 달아나자 수세에 몰렸다.
부사가 진주로 떠난 이후 성에 들어온 류식은 송빈, 이대형, 김득기와 더불어 "주장인 김해부사(김해를 지킬 의무가 있는 최고 장수라는 의미)가 비록 떠나갔으나 우리 네 사람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며 김해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원군이 오지 않는 외로운 김해성을 지켰다.
왜군이 호계천(동상동과 부원동을 흐르는 시내.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사용된다) 상류를 막아 성 안에 물이 끊겼다. 성 안의 사람들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고 항복하자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류식이 이를 꾸짖고 객관 앞의 땅을 팠는데 샘물이 솟아났다. 그 물을 들어 왜군에게 보이니 왜군은 '신(神)과 같은 사람이 반드시 성 안에 있을 것이다'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자리(동상동 874번지)에는 후손들이 '류공정(류공의 우물)'비를 세웠다.
4월 19일 밤에 왜군은 허수아비를 무수히 만들어 성 안으로 던지고 군사들을 교란시키며 쳐들어오려 했다. 성안에 남은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왜군 1만3천명이 김해성을 세 차례 사다리를 타고 성벽 오르며 공격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조선군과 의병, 부민 등 2천여 명은 돌과 끓는 물을 성벽을 오르는 왜놈에게 던지고 부어 물리쳤다.
하지만 1만3천여명의 왜군은 김해 들판의 보리를 모두 베어 성 밑의 참호를 메우고 성벽과 동일한 높이로 쌓아올린 뒤 이를 밟고 성벽을 넘었다. 성 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왜적을 꾸짖으며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싸우다 순절했다.
성은 결국 중과부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적들은 투항을 권고했지만 네 사람은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의병들과 함께 끝까지 적들 한가운데에서 싸우다가 순절했다. 1천여 의병들도 모두 순절했다.
며칠 뒤 송빈의 군사 양업손(梁業孫)이 시쳇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살아나와 김해읍성의 장렬한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 덕분에 네 충신들은 전란이 끝난 1600년(선조 33) 병조참의 등 벼슬을 추증 받았다. 하지만 그뿐, 다시 역사 속에 묻혔다.
1708년(숙종 34), 이순신의 현손 이봉상이 김해부사로 와서 `금주지(金州誌)`를 보다가 김해읍성 전투의 전말을 알고 감격했다. 그가 나서서 조정에 건의한 끝에 송담서원이 건립되었다.
1833년(순조 33)에는 표충사(表忠祠) 사액도 받았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맞아 훼철되지만 1871년(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 등의 상소에 힘입어 사충단(四忠壇, 경상남도 기념물 99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서원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되었다.
김해시는 김해성으로 쳐들어 온 왜적에 맞서 사흘간 성을 지키다 순국한 음력 4월 20일을 정해 매년 제례를 올리며 우국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다.
한편 김해 사충단 표충회에서는 네 분을 향사(표충사) 하는 송담서원지(松潭書院誌)를 발간했으며 서원지를 통해 역사적 사실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못하고 있는 김해 의병사의 진실이 소상하게 조명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2018년 12월 7일 김해성 사충신 학술회의서 '김해 사충단 제향, 국가적 차원 이뤄져야', '역사 교육장 되도록 다같이 노력' 필요 강조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온 나라가 피난 가기에 바빳고 국록을 먹는 수령들도 달아나기와 숨기가 일수인 판국인데도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의 사공(四公)은 아무런 직책도 책임도 없는 백의은사(白衣隱士) 등의 몸으로써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왜적과 싸우려고 스스로 총칼 앞에 나섰다.
이러한 사공의 충절이 부사와 도백을 통하여 조정에 알려지자 증직(贈職)의 은전이 내려졌고 사회적으로는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하는 등 국가적 사회적으로 숭봉(崇奉)하고 있는 것이다.
네 명의 의병장은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김해성을 공격해와 성의 주장군이던 서례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각기 의병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끝까지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임진왜란 후 3년만인 1600년(선조 33년)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며 각자 벼슬을 올려줬고 1708년(숙종 34년) 지방사림의 도움으로 지금의 동상동에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가 1833년(순조 33) '표충사'라 이름했다.
1871년(고종 8년) 단을 설치해 ‘사충단’이라 하고 비를 세웠으며 동래성 함락 후 김해성으로 쳐들어 온 왜적에 맞서 사흘 간 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음력 4월 20일 매년 제례를 올리며 우국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이렇듯 임진왜란 의병의 시초가 된 김해 사충신을 탐구하는 학술회의가 2018년 12월 7일 오후 2시 인제대학교 인정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동서대 김태영 교수, 진주교대 임종욱 교수,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 경상대 남명학연구원 조구호 교수의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임종욱 진주교대 교수는 "사충신에 대한 문헌 기록은 과거의 것에만 국한될 이유는 없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확산되고 전파되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 지역에 국한된 충절로만 여겨져 사충신의 의연한 순절이 전국적인 관심의 밖에 있는 듯해 아쉽다"면서 "다른 많은 순절의 기억처럼 사충신의 위업도 널리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는 "김해성 4충신에 관해서는 김해 사람들은 물론 학자들도 잘 모른다"며 "주야장천 가야 타령만 한다고 해서 김해 지역사가 반듯하고 균형 있게 놓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서 그는 "김해의 향사인 허경윤 등의 문집이 옮겨져야 한다"면서 "대눌 노상익과 소눌 노상직 형제가 편찬한 선친 노필연의 <극재집>에 '김해향사 7인열전'이 실려 있다는데 아직도 번역되지 않아 접근할 수가 없다"고 했다.
조구호 남명학연연구원은 "역사는 단지 역사책 속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사충단의 관리와 제향(祭享)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김해 사충단을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의 교육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여 년 동안 김해 사충신 선양 의병기념관 건립을 촉구하고 있는 '새로운김해만들기시민포럼' 조유식 상임대표는 “의령군이 곽재우 장군을 선양하는 의병 박물관을 건립하여 당시 전쟁 상황 조형물 전시와 참배를 통해 의병의 고장 충효예 사상을 고취시켜 군민의 긍지와 자존심 아이들에게 의병의 고향 충절의 고향이라는 학습과 체험 행사와 다양한 사업들을 하고 있듯이 김해시도 우리나라 최초 1천여 의병과 의병장 사충신의 충절과 혼이 담겨 있는 의병 도시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사업들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김해의 위대한 역사 인물 임에도 사충신과 1천여 백성 의병들에 대한 추모와 선양은 고사하고 사리사욕에 눈먼 문화원장과 동상시장번영회 회장 등 지역유지들의 농락에 의해 유공정 바로 옆 도심에 있던 사충각을 지금의 분성산 중턱으로 밀어 올려 시민들과 학생들이 쉽게 찾아 갈 수조차 없도록 하여 우리들 속에서 점점 잊혀지게 했다. 지금이라도 용서와 사죄하는 각오로 의병기념관을 시내에 건립하여 사충단을 도심으로 원상복구 시키고 추모하고 선양하는 사업들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새로운김해만들기시민포럼
상임고문
박 영 배 (영남매일 김해미래포럼 상임고문)
법장스님 (김해사충신선양회 회장)
서 환 억 (김해시산림조합 조합장)
오 세 현 (북김해새마을금고 이사장)
진 동 기 (서부새마을금고 이사장)
주 종 규 (전, 회현새마을금고 이사장)
주 영 길 (부원새마을 금고 이사장)
상임대표
조유식 (영남매일 의병장사충신선양회 이사장)
김중윤 (인제대학교 격원교수)
공동대표
김만진 (활천동새마을금고 이사장)
이영출 (전, 김해시읍면동 이통장협희회 부회장)
강이만 (김해시축구협회 회장)
김학찬 (전, 김해시농업인연합회 수석부회장)
김근형 (전, 김해시학원연합회 회장)
배상기 (김해시소상공인연합회 부회장)
이정희 (해병대 김해전우회 전 회장)
강진영 (김해시청년연합회 회장)
박해준 (김해시재향군인회 청년단당)
이원달 (칠산초등학교총동창회 회장)
김진령 (영남매일ㆍYN뉴스 대표)
권우현 (김해시장애인시설후원회 회장)
오재환 (전, 김해자동차전문정비사업조합 회장)
김경희 (좋은학교운동연합 김해지회 회장)
최금연 (사단법인 행복1%나눔재단 대표)
사무국장 이근숙 (영남매일ㆍYN뉴스 지역기자)
조직국장 조형호 (김해시축구협회 서부축구연합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