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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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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에 대하여
  • 도명 스님
  • 승인 2020.09.14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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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영남매일 지면으로 지난 7월 15일부터 6회에 걸쳐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이라는 글을 연재해 왔다. 먼저 졸고(拙稿)를 수차례에 걸쳐 실어주신 영남매일에 감사를 드린다.

위의 논문은 통도사에서 지난 6월 27일 가야문화 진흥원과 동명대 인도문화 연구소가 주최, 주관한 '제5회 가야문화 원형탐색과 콘텐츠화'라는 가야불교 학술대회 발표논문이다.

언뜻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과 가야불교가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허황옥의 가락국 도래와 가야불교의 전래는 둘로 나눌 수 없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점을 나름 고찰 해 보았다.

이제 글을 마침에 즈음하여 맺음말과 함께 가야불교에 대해 말씀드리며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그럼 가야불교란 과연 무엇인가?

가야불교는 역사적 사실인가?

가야불교란 초기 가락국부터 가야 전체를 통칭한 불교의 역사, 인물, 유적 등 불교문화와 관련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불교와 별 차이가 없으리라 보여진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의 불교도래 과정과 성격에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으며, 삼국의 불교전파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에 가야의 불교 전파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이 있다.

보통, 종교는 전래, 수용, 공인, 포교의 과정을 거치는데 삼국의 불교는 모두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하고 가야불교도 삼국유사에 뚜렷이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 고대사에서 가야가 지워지고 잊혀 졌듯이 가야불교도 그 운명을 같이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었다.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권3 '탑상편 파사석탑 조'에 보면 '금관성의 호계사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세조 수로왕의 비 허황후 이름 황옥이 후한 건무 24년(서기 48년) 무신년에 서역 아유타국으로부터 올 때 싣고 온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파사석탑은 2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지금도 허왕후릉 앞 보호각에 있다.

허왕후가 가락국에 오실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 곧 불교 상징물이기에 이때를 가야불교의 최초 전래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

파사석탑은 '삼국유사' 기록 당시 일연스님이 직접 와서 보았고 그 감회를 시로 남겼으며, 원로 향토사학자인 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이 학술적인 차원에서 원형과 재질을 연구하며 화학적인 실험을 통하여 파사석탑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중요한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 최근 고려대 산학 협력단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란 연구결과까지 얻었다.

그러나 “가야는 3~4세기에 건립됐다. 수로왕 허황후는 신화다. 가야불교는 유사역사다.” 등의 허무맹랑한 논설로 가야와 가야문화를 폄훼하는 이들도 있기에 그 아쉬운 점을 말하고자 한다.

좀 오래전 이야기지만 지난 1998년 동아대 박물관에서 발행한 '김해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의 파사석탑 편에 보면, “이 탑은 석재를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쌓은 것이다. 경내의 석탑 파편들은 자연석의 파편으로 보인다.” 등의 현장조사도 하지 않고 어디 허접한 글을 인용한 박 모 연구원의 글은 내용면에서 참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또 지난 7월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린 '가야의 기록 - '가락국기'를 이야기 하다' 란 학술제전에서 합천박물관 조원영 관장은 다른 논문을 인용하면서 “파사석탑의 아래 부분은 목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의 출목양식이며, 14C세기경의 석탑 양식과 같다. 원나라 이후 조성됐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을 시기면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와 거의 동시대인데, 일연스님이 이제 막 만들어진 새(新) 탑을 보고 1200여 년 전에 속하는 “이 탑은 허왕후가 싣고 왔다거나, 천고의 남쪽 왜” 라고 하는 세월의 흔적을 괜히 이야기 했겠는가? 또 장유화상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장유(長遊)라는 산 이름을 본 따서 장유화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라고 했는데, 현재 알려진 장유화상의 문헌상의 기록은 '가락국기'에서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한(452년) 후 500년(952년)에 장유사(長遊寺)를 창건했다 하였고, 1544년에 기록한 주세붕의 '장유사 중창기'인데 여기서 장유화상이 화주(化主)라고 했다.

1544년 이면 조선전기이지 후기가 아닐뿐더러 주세붕 이전에 이미 구전이던, 유실된 기록이던 장유화상의 근거가 있기에 당대 대학자인 주세붕이 창건기도 아닌 중창기를 썼던 것이다.

아무튼 가야에 대한 유적과 기록을 연구자들이 좀 더 정확하게 연구발표 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허왕후와 함께 오지 않은 걸로 나오고 그 점을 문제 삼는데 '가락국기'는 일연스님도 전문(全文)이 아니라 요약해서 싣는다 했기에 누락될 수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은 장유화상이 동생인 허왕후보다 먼저 가락국에 와서 수로왕과 뜻을 함께 하여 가락국 불국토 계획을 세워 그 일환으로 여동생과의 결혼을 추진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최근 부산외대 이광수 교수의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라는 책을 보면 많은 연구와 정교하고 복잡한 논리로 허왕후가 신화이고 유사역사이다 라고 부정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실의 바탕이 아닌 추정과 가설이 내용의 대부분이다.

허왕후와 가야불교를 추정과 가설로 부정하지만, 오히려 이 교수 스스로가 추정과 가설로 일관하고 있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가락국기'에 보면 수로왕이 도읍을 정할 때 1,500보 가량의 외성(外城)을 설치하고 (신이나 부처를 모시는) 전우(殿宇) 지을 터를 정(定)하셨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난 2019년 봉황동 유적 인근에서 가로, 세로10m, 높이20m의 정방형 목탑지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주초(柱礎)를 발굴하였는데 목탑중심의 주심(柱心) 주초가 없다는 이유로 건물의 성격을 보류하고 있으나 4국 중 가장 먼저 가야에 불교가 왔고 석탑뿐 아니라 목탑도 가장 먼저 만들었다면 초기 목탑에는 주심부가 없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가야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다른 나라에서나 주심을 만들었다면 주심의 유, 무 여부가 목탑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초기에는 주심이 없어도 목탑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의 인생행로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 즉 인생관 이듯이 역사를 보는 데에도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 즉 사관(史觀)이 가장 중요하다.

가야와 가야 불교를 바라볼 때 좀 더 적극적인 시각과 열린 마음으로 보아야 가야의 진정한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가야의 활동무대가 좁은 반도가 아닌 광활한 아시아 대륙이었듯 가야불교도 반도를 넘어선 인도에서 직수입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가락국기 기록을 따라 허왕후 도래길을 연구하고 답사 고증한 결과 가락국기의 사실성에 놀랐으며 그 역사성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학자는 전 세계의 고대 결혼신화 중에서 가락국기의 수로왕과 허왕후 스토리만큼 상세한 기록도 없다고 한다.

시간을 내어서 가락국기를 일독하기를 권한다.

최근 김해 지역에서는 새롭고 중요한 발굴과 성과물이 나오고 있으며, 가야불교도 그 조각들을 맞추면 전모가 드러날 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한다.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유교이든 또 전통 민속 문화이던 모든 문화는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좁은 편견을 벗어버리고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자긍심이 생겨나고 우수한 문화민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족한 소견을 몇 자 적어 보았다.

졸고를 실어 준 언론사와 독자제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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