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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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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5)
  • 도명 스님
  • 승인 2020.08.12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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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김해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 소장)

㈒. 능현(綾峴)

능현은 공주가 먼 항해의 무사안착에 대해 산령에게 비단바지를 폐백했다는 곳인데 헌공의식을 거행할만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곳이라야 한다.

乘岾는 고개라 할 수 있는데 공주가 가마에서 내렸다면 당연히 산령에게 폐백하기 위해서 가마에서 내린 곳, 그 내린 곳은 전망이 트이고 자신의 배가 잠시 대었던 유주지도 잘 보이는 乘岾이고,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인 보배산도 잘 보이는 곳일 것이다. 峴와 岾이 언덕 고개라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능현이 곧 乘岾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가주동 산174번지 일대가 곧 乘岾이자 능현이다.

공주가 오기 이전에 乘岾라는 지명이 있었기에 수로왕이 신귀간에게 乘岾로 가라고 하였고, 공주가 비단바지를 산령께 폐백한 이후 乘岾는 능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나중에 능현이라 했기 때문에(高岡曰綾峴) 곧 乘岾, 高岡, 綾峴은 동일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 유궁(維宮)

유궁은 장막궁전(幔殿)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이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종궐 서남쪽 60보쯤 아래에 만든 임시 장막궁전이다. 공주의 환영사절 거절에 당혹스럽기도 한 수로왕이 아랫사람들을 인솔하여 지었는데 종궐 아래 서남쪽 산의 가장자리 산기슭이다. 종궐에서 조금 떨어져 산기슭의 공간이 바로 이 유궁이다. 가야시대 고 김해만의 지형을 고려한다면 당시 물이 들어왔던 주포마을의 중앙쯤의 종궐 서남 60보 아래 산기슭에 유궁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수로왕의 출자를 북쪽 출신의 유목민으로도 보는데, 유목민은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면서 쉽사리 주거용 건물로 몽고의 게르(ger)나, 아랍 사막 유목민족들의 야외용 이동식 텐트를 설치하는 문화가 있으며, 유목민들도 각각 부(富)의 정도에 따라 화려한 야외 텐트도 충분히 설치하는데 수로왕이 유궁을 설치했다는 것은 가락국의 전통문화라 하기 보다는 유목민족의 문화로 이해되는 장면이다.

또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탈해 추격하며 계림지역으로 쫓을 때 500척의 배를 동원할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갖추었던 수로왕의 야외 만전은 꽤 높은 수준의 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유궁 자리에 훗날 서기 452년 질지왕이 왕후사를 창건하게 된다.

㈔ 기출변(旗出邊)

기출변. 망산도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았을 때 동리산 아래의 고직말이 기출변이다.
기출변. 망산도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았을 때 동리산 아래의 고직말이 기출변이다.
기출변. 가덕도 서북단의 고직말(古直末)이 기출변이라 여겨진다.
기출변. 가덕도 서북단의 고직말(古直末)이 기출변이라 여겨진다.

기출변은 망산도에서 공주의 배가 처음 목격된 바닷가를 말한다. 즉 유천간에 의해 공주의 배가 망산도에서 관측될 때 서남쪽 모퉁이에서 갑자기 배가 나타나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했는데, 그 서남쪽 모퉁이가 가덕도 북서쪽 끝 지점 해안이다. 지금의 지도에서 보자면 가덕도 서북단의 동리산(洞理山) 서남쪽 아래에 있는 고직말(古直末) 쯤이 배가 나탄 지점으로 유추되며, 좀 더 크게 보면 가덕도 북서쪽 해안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고적(古蹟)조에서는 “나라 사람들은 처음 와서 배를 매어 놓았던 곳을 주포촌(主浦村), 비단바지를 벗어놓던 곳을 능현(綾峴), 꼭두서니깃발(천기: 茜旗)이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는데 주포촌 왼쪽에 있으며, 지금도 역시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고 하였는데, 이는 '가락국기'에서 ‘천기(茜旗)’가 나타났다는 기사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향후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즉 천기가 나타난 장소와 천기가 들어온 장소를 달리 볼 것인지, 아니면 기록상의 혼선으로 보아 같은 장소로 볼 것인지는 향후에 적극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바이므로 본고에서는 이쯤에서 그친다.

4). 지명(地名)의 내해(內海)로의 이전(移轉) 비정 이유

'허황후 도래 민속놀이'

'가락국기'에 “이러한 중에 다시금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으니, 매년 7월29일에 토착인과 서리와 군졸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놀다가, 동.서로 눈길을 찡긋 보내면 건장한 인부들이 좌우로 나누어, 한편은 망산도에서 고라말을 급히 몰아 육지로 달리고, 또 한편은 익새 배를 둥둥 띄워 물을 서로 밀쳐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북쪽 옛 포구에 먼저 닿는 내기를 하니,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라는 구절에 나오는 승점과 망산도 기사는 유천간 신귀간이 수로왕에게 허왕후의 도래를 알렸던 일들이 후대에 민속놀이로 발전한 상황을 묘사한 것인데, 처음에는 허왕후가 도래했던 외항의 주포 중심으로 현지의 승점과 망산도에서 놀이가 행하여졌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항인 주포가 가락국의 도읍지와 거리가 먼 지리적인 환경과 포구로서의 역할이 축소되어 민속놀이가 내항인 수도 중심으로 옮겨왔던 것 같다.

그래서 놀이할 때 내항에서 전산도를 망산도로, 승점은 또 다른 어떤 지점으로 비정하는 지명의 이동이 일어났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어떤 지점은 현 김해시청이 들어서 있는 남산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위 기사에서 말들이 경주하는 장면을 보면, 망산도로부터 출발하여 말들이 육지를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망산도가 섬이라면 말들이 물위를 달릴 수 없을 것이고, 말들이 달리려면 망산도가 육지라야 할 것이다. 고 김해만이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 때 망산도라 비정했던 전산도 주위가 점점 육지화 되어서 간조(干潮) 때가 되면 비록 질척거리는 상태이나마 말이 전산으로부터 출발하여 승재로 비정한 지점으로 달려 배와 경합하였던 것이다.

즉 망산도를 현재의 전산(前山: 전산도)으로 지명을 이전한 것은 간조 때가 되면 배와 말이 함께 경주를 할 수 있는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에 따라 섬과 육지의 양면성을 지닌 지역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작성한 김정호가 전산을 망산도로 표기 한 것은 놀이문화 때 임시로 정한 지명이 지역민들에 의해 고착화 되었고, 김정호는 지역민들이 전하는 대로 표기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이러한 전후의 사정에 대한 문헌이나 구전이 없어 이후 연구자들이 도래경로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5). 명월사와 왕후사의 위치

㈎. 명월사(明月寺)

흥국사.
흥국사.

‘김해명월사사적비’에 '명월산은 김해부 남쪽 40리에 있는데 절이 있는 곳은 … 수로왕이 창건한 바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수로왕과 허왕후가 이 산에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 사찰이 있는 곳은 높은 언덕아래 동남쪽을 향해 있으며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수로왕이 세자를 위해 지은 신국사(新國寺)는 산 서쪽 벼랑에 있고, 허왕후를 위해 지은 진국사(鎭國寺)는 산 동쪽 골짜기에 있으며, 자신을 위해 지은 흥국사(興國寺)는 산 가운에 있으니 곧 이 절로써 명월사는 옛 흥국사와 같은 절이라고 하고 있다.

허왕후가 산령께 감사하다고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드리니 산 이름을 명월이라고 하고 세 곳에 절을 짓도록 했다고 기록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보배산이 명월산이다. 고 지도에도 명월산으로 표기된 적이 있으며 지금도 보배산 옆의 봉우리를 명월산이라 하는 것을 보면 보배산과 명월산은 동일한 지명이다. 이 보배산이 김해 남쪽 40여리에 있으며 산 언덕 아래의 중앙에 명월사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에 보면 가락국 제8대 질지왕 2년(서기 452년)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했고,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 보면 제8대 질지왕 2년에 “그 지역에 있는 절은 그대로 두고 또 왕후사를 창건하여(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 라고 한 구절을 보면 왕후사 이전에 절이 또 하나 그 곳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으로 보아 김해명월사사적비에서 이야기한 세 절 중의 가운데 절이 흥국사이고 그것이 훗날 명월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제8대 질지왕 시대에 허왕후를 위해 왕후사를 지을 때까지도 명월사가 그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명월사사적비와 파사석탑조에서는 수로왕이 자신을 위해 지은 절이 보배산 중앙에 있었고 후손 질지왕이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곳인 유궁자리에 왕후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 명월사는 왕후사 폐사 이전에 폐사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서기 452년에 왕후사를 창건하고 나서 500년이 지난 시점에 장유사를 창건하는 서기 952년에 왕후사를 폐사하는 당시에 주위 다른 절에 대한 언급은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왕후사가 폐사될 때 사찰의 흔적이 될 만한 것은 전혀 없도록 창고와 마굿간으로 사용해 버렸고, 지금 현재는 사찰이 있을 만한 곳에 주거지가 들어서 있음으로 옛 명월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보배산 현장 답사 중에 이전에 폐사되었다던 산 서쪽의 신국사와 산 동쪽의 진국사에 대한 것으로 간주되는 말을 주포 마을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에 현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진국사의 터로 보이는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 산20번지 일대에서 건축물의 축대와 여러 점의 암키와와 수키와 파편을 목격하였는데, 이 지역은 일반인의 기와집이 들어설 장소가 되지 않는 입지적 환경이어서 향후에 지표조사 및 정밀조사 과정에서 진국사의 터로 밝혀지길 바라는 바이다.

보배산 동쪽의 진국사 터로 보이는 송정동 산20번지.
보배산 동쪽의 진국사 터로 보이는 송정동 산20번지.

㈏. 왕후사(王后寺)

왕후사는 가락국 제 8대 질지왕이 서기 452년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유궁자리에 지었다고 '가락국기'에 적혀 있으며, '김해명월사사적비'에도 수로왕이 만전을 설치하고 왕후를 맞이한 후 다음 날 궁궐로 돌아 올 때 왕후가 비단바지를 산령에게 폐백으로 드리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산 이름을 명월이라 하고 세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궁 자리를 종궐 서남쪽 60보 아래 산기슭에 만들었다 하니 그 자리가 왕후사 터다. 또 왕후사를 지어질 때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라고 한 걸 보면 왕후사와 같은 공간에 하나의 절이 그 곳이 먼저 있었다는 뜻이니 그 절이 수로왕이 명월산 가운데 지었다는 명월사이다. 그래서 왕후사가 있는 곳은 왕후사 동북쪽 60보 위에 종궐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주변에 명월사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명월사·종궐·왕후사 세 건물이 존재하는 곳을 동일한 공간으로 추론해 본다.

왕후사가 지어진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년) 이후 500년이 지나서 장유사를 세웠는데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가 장유사 경제권의 동남쪽 구역 안에 있다하여 절을 폐하고 농장의 창고와 말과 소를 치는 마굿간으로 만들었다고 일연스님은 장탄식과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왕후사 창사 이후 500년이 지난 서기 1000년쯤 장유사를 건립했는데 장유사의 사격이 꽤 컸던지 그 일대의 주요 사찰 내지 그 일대에서 본사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왕후사는 사격이 작은 말사 정도였는데, 장유사의 삼강스님(삼직스님)들이 본사 살림살이에 해가 된다는 명분을 붙여 말사인 장유사를 폐하고 농장과 마굿간으로 만든 것으로 보면 양사 간에 깊은 갈등과 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신뢰성은 좋은 것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일들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왕후사의 터는 오늘날 주포마을 가운데에서 서남쪽 산기슭 어느 지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왕후사의 위치가 장유사의 동남쪽에 있다 했는데 주포마을 왕후사 터가 옛 장유사 터인 원래 장유사에서 보면 동남 방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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