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매일 PDF 지면보기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과월호 호수이미지
최근 김해종합뉴스
행복1%나눔재단 희망캠페인
함께해요 나눔운동
時도 아닌 것이
행복밥집
TV 방송 영상
커뮤니티
다시보는 부끄러운 김해 현장
파헤쳐진 남산ㆍ잘려나간 김해 남산
상태바
파헤쳐진 남산ㆍ잘려나간 김해 남산
  • 조현수 기자
  • 승인 2017.06.20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대는 아는가 남산의 역사를…`
▲ 1980년도의 남산 모습. 김해시청사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원안).

월간 금관가야(발행인 조유식)가 22년전 1995년 5월에 보도한 기획특집을 재조명해 본다.

남산은 분산(盆山) 줄기의 끝인 데 개가 엎드린 모양(伏拘形)이라고 개 용(冗)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원뫼뿌리라고도 한다.

이 산은 상동면으로 가는 나전고개(노인봉)에서 시작하여 송학산(松鶴山), 분성산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좌용맥(左龍脈)이 이곳에서 반전(反轉)하여 읍내(나전고개)를 되돌아 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고조산(顧助山)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 산에 성황당, 신우단 등이 있었고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와 당선각이 있었다.

그 옛날 국도는 남산 앞 기슭을 돌아 활천 방면으로 돌아 갈 수 있었고 남산의 서편에는 남지가 있었다. 이곳에 큰 못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의 김해중학교 앞이었다.

이 못은 정조 13년(1789년) 부사 이우현이 읍기(邑基)에 도움이 되고 부민(府民)에 유리하다고 하여 새로 판 못이다.

주위에 김해중학교가 들어서고 1977년 2월 김해 도시계획에 따라 완전히 이축(理築)되고 그 자리에 2450평의 부지로 1977년 9월 김해군청을 착공하여 1978년 4월 준공되었으니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1933년 새로운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이못의 남단(南端)을 지나서 남산 기슭으로 나오는 길이 옛날의 국도였다.

1935년경 일본이 풍수지리학설에 의하여 김해인의 정신적 말살 정책을 꾀하기 위하여 구지봉을 파괴하고 도로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남산 후미(활천고개)도 잘라 도로를 내었고 남산 앞부분(남단)은 헐어 공동묘지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김해군이 부원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일환으로 남산 앞부분에 일인이 만들어 놓은 공동묘지를 헐고 토취장으로 사용하다가 그 자리에 지금의 시 청사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남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기슭은 가락국 시대의 주거지역으로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유적을 부원동 패총(貝塚) 또는 남산 패총이라 불렀다.

지금의 부원동 636, 634, 684번지이며 구획정리공사를 위한 토취장이 되어서 남산의 유적이 파손되기 전에 문화공보부의 발굴허가를 얻어 1980년 4월 동아대학교 정중환 씨를 단장으로 하는 발굴조사단이 구성되고 발굴에 착수하여 3개월 만인 7월25일 완료하였다.

이곳에서 회청색(灰靑色) 및 적갈색(赤葛色) 토기(土器)와 소도자(小刀子),  부(斧),  조(釣) 등의 철기와 도자병족(刀子炳鏃), 첨두기( 尖頭器) 보골(卜骨) 등의 골각기 지석, 부 연석 유구석구부 마제석검 석족 등의 석기와 쌀 보리 밀 팥 등의 탄화된 곡물 등의 많은 유물과 주거지 분묘 등도 발견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철기시대 초기의 문화양상과 가락국 형성기의 이곳 주민 생활상을 알아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원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남산의 하반부가 주거지역으로 시청에서 활천고개를 연결하여 도로를 개설하는 통에 상단부분만 남게된 남산리 청룡마을 웃새미 등으로 불렸던 이곳에 예종때 지리지에 의하면 호장배지(戶長裵지)  효자정문(孝子旌門)과 당산나무 통새미 등이 있었다.

그런데 구획정리사업으로 모두 없어지고 다행히 그 당시의 당산나무는 남아 있다. 당시의 당산각은 60여년 전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당산각은 칠성각으로 변해졌으며 이 당산 나무도 얼마 못 가서 철거된다고 한다.(지금은 사찰도 당산나무도 다 사라지고 없다)

활천고개는 일본의 잔악한 만행으로 잘려진 허리부분을 우리는 아무런 느낌 없이 수년을 밟고 다니며 살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일본인이 개설한 도로는 폭이 8미터정도였는데 지금은 수천 미터까지 헐어 택지조성으로 고층아파트가 건립되고 도로는 4차선으로 확장되어 있다.

반면 고개 넘어 시가지 입구 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날로 늘어난 차량과 병목현상으로 인해 잦은 교통사고를 유발시키고 있으며 지역유지 및 유력 인사의 집이나 땅 건물 등을 비켜서 도로를 확장하다보니 도로는 지렁이가 기어간 것 같이 굽어있거나 좁혀져 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지금의 남산(활천고개)은 산이 아니다.

깎이고 패여서 남산의 장엄하던 그 형체는 찾아볼 수 없으며 고층아파트와 유흥업소로 2000년대를 달리는 새로운 콘크리트 인조 남산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가하면 도로의 경사가 심해 시내에서 활천 방면으로 나가자면 도로가 갑자기 높아 있는 관계로 시내로 들어오는 차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갑작스런 차선 변경으로 속된 말로 `받쳐 죽기 십상`이다.

구지봉이 김해지역 수십 개 산봉우리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면 남산은 호조산 분성산의 정기를 받은 김해 중심에 위치한 심장부와 같은 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을 부원지구구획정리사업으로 파고파고 또 파서 이제는 상단부분(정상)만 조금 남아 있다.

이 조금 남아있는 남산의 일부분도 못마땅한지 한국전력의 고압선 철탑이 버티고서서 전기로 뜸들이고 있으니 하루는 교통사고로 또 하루는 술주정꾼들의 고함소리로 또 다른 하루는 청소년들의 탈선장소로 남산주위가 조용할 날이 없다.

그리고 변변한 시민공원 하나 없는 곳이 우리 김해의 현실이다. 인구만 市(시)이지 문화시설이나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은 面(면)보다도 못한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김해이다.

당연한 것이 숲이 우거지고 경관이 좀 좋다 생각되는 곳은 불도저로 깨끗이 밀어버비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 건물만 들어서다보니 서울의 남산이나 부산의 용두산 같은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을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아파트가 들어선 시멘트 벌판이 되기 전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땀이라도 식힐 언덕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언덕은 고사하고 잠깐 쉬어갈 돌멩이 하나 없는 콘크리트 벽에 갖힌 숨 못 쉬는 남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진정 김해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남산의 잘려진 부분을 지금의 구지봉처럼 터널 형태로 허리를 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며 남산을 공원화하여 성조암과 연계하여 옛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일설에 김해는 몇몇 유지어른들에 의해 도시개발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들 하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도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문화재나 유적지, 사적지 보존은 뒷전이 되었고 시민들의 불편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현실이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숨 못 쉬는 남산에 숨통을 틔워주고 흔적만 남은 이 산에 옛날의 모습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사방이 파헤쳐진 남산. 바로 옆 80년대인 10여년 전의 남산과 대조적이다.(93년도 촬영)
▲ 1995년 5월 금관가야 표지.
▲ 남산 뒷쪽에서 분성산 쪽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고층아파트(활천고개 삼거리ㆍ1995년 촬영).
▲ 보림사의 칠성각과 당산.
▲ 땅 소유주에 의해 철거위기에 처해있는 남산의 수호신 당산. 중장비 기사가 뿌리를 파내는 작업을 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철수이후 공사가 중지되어 있다.
▲ 회현리 폐총 사적 제2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