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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는 과연 인도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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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는 과연 인도에서 왔을까?"
  • 조민규 기자
  • 승인 2017.04.1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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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 기록 놓고 해석 분분(紛紛)하기도

제23회 가야사국제학술회의가 지난 7~8일 양일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가야인의 불교와 사상'을 주제로 열렸다.

주제발표에는 ▲산토쉬 굽타(서울대 규장각) 수석 연구원의 '한·印 외교사에서의 아유타국과 김해' ▲이광수(부산외대) 교수의 '허황후 신화 만들기' ▲주영민(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학예사의 '가락국 불교전승 관련 유적 연구' ▲윤호필(중부고고학연구소) 학예실장의 '가야지역의 선사·고대 수변의례' ▲야마다 히로유키(日本宗像市) 학예사의 '오키노시마의 제사와 신앙' ▲권오영(서울대) 교수의 '고대 동아시아 바닷길의 개통과 김해' ▲박장식(홍익대) 교수의 '가야 신라의 철기기술체계 형성에 미친 인도의 영향과 그 가능성에 관한 연구' ▲송원영(대성동고분박물관) 학예연구사의 '허왕후 신화 만들기'등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들 3개국 학자 10명이 열띤 주제발표와 토론은 △가야불교 전파 유무 △고대 인도와 교류 △가야인 토착 신앙 연구 등을 낱낱이 조명했다는 것에 의미을 두었다.

특히 '허왕후는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하는 대목에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산토쉬 굽타(서울대) 수석 연구원은 "인도의 아유타 왕족과 김해 가락국 왕족의 고대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역사적 증거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며 "오히려 '삼국유사'의 신화적인 연관성이 왜곡되어 새로운 연결과 왕실 가족의 항목이 표면화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허왕후는 본디 아유타국 공주로서 성은 허씨고 이름은 황옥이며 김해에 건너왔을 당시 나이는 16세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하나 '삼국유사'는 1280년경에 만들어진 역사서로 한국 고대 삼국에 관한 전설, 민담(民譚), 역사를 모은 책이다"고 설명했다.

산토쉬 연구원은 "한국 불교가 4세기에 들어 왔다고 하지만 한국에 인도 문화가 1세기 부터 시작되었을 수 있다"면서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결혼을 다룬 1세기의 내용으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신화인지 아니면 저자의 상상력인지에 대한 복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불교가 배경인 '한국 아유다'와 힌두교가 배경인 '태국 아유타' 서로 차이가 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광수(부산외대) 교수는 "허황후 설화는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다양한 설화(說話)들이 층위를 이룬다"고 하면서 "현재로서는 허황후 신화(神話)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지만 그 뼈대가 만들어진 이후 그 위에다 다른 설화들을 만들고 흡수하면서 확대되어 왔다"고 했다.

그는 "불교 사찰에서 시작한 허왕후 신화는 18세기 들어 김해의 명월사를 비롯한 작은 사찰들이 사원 비즈니스 차원에서 만들기에 적극 나서면서 조작과 날조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특히 "허왕후의 형제 장유화상이라는 인물의 창조다. 그와 허왕후 아들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1980년대 이후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들에 의해 마치 '가락국기' 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형의 이야기처럼 퍼져나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주영민(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학예사는 "5세기경에 불교가 가락국에 전래되었다는 설(說)이 가장 유력하게 인정받고 있다"며 "적어도 4세기대에는 해상교통로를 통해서 백제에서 가락국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었다"고 제기했다.

그는 "김해시 장유면 응달리 태정산 일대가 선사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 까지 누대에 걸쳐서 사람들의 생활터전으로 이용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육안조사인 지표조사에 그쳐서는 안되고 반드시 시굴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호필(중부고고학연구소) 학예실장은 "가야지역 선사·고대의 수변의례에 대해 아직 많은 자료가 부족하고 연구방법이나 연구이론도 부족함을 느꼈다"면서 "패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의례행위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야지역에서는 하천이나 저습지를 기반으로 한 의례보다도 해양을 기반으로 한 의례가 주도적인 역할릉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해안의 중요한 교통로를 점하고 있어 해양교류가 빈번하고 해양세력으로서의 역할이 증대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야마다 히로유키(日本宗像市) 학예사는 "허왕후는 바다로부터 온 존재이고 타고 온 배를 엎어 놓았더니 '돌배'가 되었다"며 "허왕후의 도래(到來)를 감사한다는 분성산 해은사(海恩寺), 아들 낳게 해준다는 진해 용원의 몽돌 같은 것이 김해지역에 전승(傳承)돠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허왕후는 파도의 신(波神)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婆裟石塔)을 싣고 왔다는 것처럼 허왕후가 해상안전의 신과 같이 해석될 수 있는 역사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박장식(홍익대) 교수는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도특한 철기기술체계가 실행되고 있었다"면서 "이러한 주철의 기술은 중국식 시술체계와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은 한국 철기기술의 기원을 중죽으로 보는 견해와 정면으로 대치된다"고 주장했다.

송원영(대성동고분박물관) 학예사는 "대성동고분군이 발굴되기 전에는 수로왕릉과 왕후릉, 구지봉 등을 믿지 못하고 김해가 금관가야의 고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었다"며 "수로왕이 축조했다는 나성이 최근 발굴되기 전에는 가락국기의 모든 내용을 허구로 여기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수릉원의 목관묘 발굴을 통해 수로왕릉의 존재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으며 '가락국기'의 신답평 관련 문헌 기록도 봉황동유적 발굴결과로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 학예사는 "허왕후 신행길도 해상을 통한 무역루트를 상징화한 것으로 대다수가 인정하는 측면을 고려하면 허왕후 관련 설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무조건 조작과 날조로 보는 것은 오히려 비학문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가락국기의 기록이 점점 신뢰성을 얻어가는 시점에서 유독 허왕후 관련 부분만 조작으로 모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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