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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산도(望山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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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산도(望山島)
  • 이균성 기자
  • 승인 2008.09.07 15: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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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의 개발로 고립위기에 처한 지금의 망산도 전경이다.  

허황옥이 가야로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들의 만남이 운명으로 보여지는가?

삼국유사에 보면 허황옥이 망산도에 도착해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침전에 들어 수로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에 상제(上帝)를 뵈오니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首露)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신이자 성인이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꿈을 깨고 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 곳 가락국을 향해 떠나라' 했습니다(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作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비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리家邦 未定匹隅 卿等須遺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이於此而忽辭親向彼呼 往矣) " 

 

   
  ▲ 망산도 표지석이 주변 공장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말 하나로 운명이라는 표현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허황옥이 망산도에 도착하기 전 사연을 보면 두 사람의 만남이 운명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후한 건무 24년 무신년(기원 48년에 해당된다) 7월 27일에 구간(九干)등이 아침에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대왕께서 아직 반려자를 얻지 못하셨으니 신(臣)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라고 아뢴다.

그러자 수로왕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므로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그리고는 유천간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에 가라고 명령한다. 수로왕은 이미 왕이 되고 허왕후를 만나게 될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있고 허왕후 역시 상제 곧 하늘의 뜻을 받들어 가야로 오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허왕후를 만난 수로왕은 이미 알고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공주께서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해도 따르지 않았는데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으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묘躬多幸).  

그렇다면 허왕후가 타고 온 배를 횃불로 표시하여 안내했다는 망산도는 어디이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망산도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진해시의 용원동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전산도(前山島-현 삼정동 부근)를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망산도라고 표기하고 있고 당시 이 곳이 내해(內海)였다는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타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재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망산도는 진해시 용원동 산 222번지에 위치하고 썰물 때는 뭍과 연결되는 작은 섬이다. 작은 암석과 많지 않은 잡목들만이 그 옛날 허왕후가 물살을 가르고 찾아 든 옛 가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곳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89호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서 있는데 여기에는 "수로가 왕이 된지 7년, 용원동 앞 작은 섬 망산도로 유간천을 보내 바다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색의 돛과 기(旗)를 단 돌로 만든 배를 맞았는데 거기에는 허왕후와 그 일행들이 타고 있었다" 고 적고 있다.

또 왕후가 타고 온 배가 망산도 동북쪽으로 약 70m 쯤 되는 곳에서 뒤집혔는데 그것이 지금의 유주암(維舟岩)이라는 것이고(허왕후는 돌배를 타고 왔다고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으로 실제 돌로 만든 배가 아니라 파사석탑을 싣고 왔으므로 돌배라고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1908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유주비석이다. 망산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석에는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 허씨유주지지(大駕洛國 太祖王后 普州太后 許氏維舟之址)라고 적어 이 곳을 통해 허왕후가 가야로 들어와 수로왕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허왕후가 5월에 아유타국을 출발하여 7월 27일에 도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약 3개월이 걸렸다는 얘기다. 일부 향토사학자는 허왕후가 인도 탐록에서 니코바루군도(Nicobar群島)를 경유하여 수마트라, 중국 광주(廣州)를 거쳐 가야로 왔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추론도 하고 있다. 계절풍을 이용했으면 90일의 항해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허왕후의 도착지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그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망산도 이외에 처음 배에서 내렸다는 주포(主浦ㅡ임개), 비단바지를 벗었다는 고개인 능현(綾峴-비단고개), 산신에게 고했다는 진현(陳峴-무금티고개), 수로왕과 왕후가 합혼(合婚)을 했다는 곳에 지었다는 왕후사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료들의 입증 여부를 떠나 우리가 허왕후에 주목하는 것은 이미 2천년 전에 바다를 건너와 가야의 왕후가 되었고 자신은 물론 아들, 손자까지 자기와 함께온 신하(신보-申輔, 조광-趙匡)들의 자손들과 혼인을 시켰다는 개방과 양성평등정신이다. 그리고 적절히 지도력과 포용력을 발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런 허왕후의 자취는 지금도 김해 곳곳에서 숨쉬고 있고, 망산도는 그 많은 자취를 만든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지금은 작은 섬으로, 비석 하나에 눈과 비를 막는 비각 하나, 역사를 알리는 표지석 등이 전부이고 과연 허왕후가 타고 온 배를 횃불로 인도한 곳이 맞는지 조차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쨋든 망산도는 가야의 시작이자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우리들 마음속에 그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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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2009-09-11 00:47:08
방위가 바뀐 건 아닌지? 그리고 유주비문에는 배를 엎어 놓았다고 하던데....!
어쨌던 훌륭한 기사인데 계속되길 거듭 기대해 봅니다.

가야인 2008-09-09 21:35:58
이기자님 가야를 아는데 많이 도움이 됩니다. 혹시 장유화상에 대해서쓰실 계획은 없나요? 좀 써주시면 좋겠는데...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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