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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전래 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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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 전래 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1>
  • 조현수 기자
  • 승인 2016.01.25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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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역 경전에 나타난 음역어를 중심으로

2000년의 숨결 가야문화 학술대회가 `가야문화 원형의 탐색과 콘텐츠화`를 주제로 지난 16일 가야대학교 대강당 국제 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김해 여여정사가 주최하고 동명대학교 문화 융ㆍ복합 콘텐츠 연구소가 주관했으며 가야대학교가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는 제1발표: 가야불교 전래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황정일 박사ㆍ보조사상 연구원, 기획실장) 제2발표: 불교의 가야 전래에 대한 일연의 인식과 가야불교의 성격(석길암 교수ㆍ금강대학교) 제3발표: 기원 1~3세기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한지연 교수ㆍ금강대학교) 제4발표: 가야시대 부산지역 불교에 대한 예비적 검토(이근우 교수ㆍ부경대학교, 부산경남 사학회 회장)가 발표를 했다. <편집자 주>


가야불교가 인도 아유타지역에서 허황옥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설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기'에 명시된 이래 현재까지 논란 중에 있다.

이는 1970년대 이종기의 '가락국 탐사' 라는 책이 출판된 이후 본격화 되어 현재 가야불교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정수일, 김병모의 책으로까지 이어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근거로 가야불교는 A.D. 42년에 지금의 김해지역에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 허황옥 공주와 오빠 장유화상 일행이 망상도에 도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국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372)때 처음으로 전래되었다는 기존 학계의 북방불교 전래설과 상반되는 남방불교 전래설을 주장한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불교 남방불교 전래설을 따르면서도 그 지역이 인도 중부 혹은 북부에 위치한 아유타가 아닌 남인도의 아유타를 주장하는 학설과 더불어 아유타 자체가 라마야나 신화 속의 허구적 장소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유타라는 지역은 가야불교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전래시기와도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어떤 부류의 불교가 처음 들어왔는가를 규명하는 것과도 관련될 수도 있다.

즉 일부 학자들은 최치원의 비문을 예로 들어 한국에 처음 전래된 불교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 부파불교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사료가 없어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지만, 가야불교가 아유타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이 입증된다면 이 주장 역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유타라는 지역은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지역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상충하고 있어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논자는 선행연구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논구해 보고자 한다. 즉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유타라는 고유명사 하나만을 중심으로 그 지역을 한정하고 있지만 사실 한역 불전에 나타난 아유타는 많은 음역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 다양한 음역어를 분석 및 비교한다면, 기존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유타라는 지명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역 불전에 나타난 아유타의 위치

 

   
 
  ▲ 부산시 강서구 있는 용원에 망산도.  
 

아유타는 산스끄리트 ayodhyā(Pāil. ayojjhā)의 음역어이다. 의역은 난승(難勝), 무투(無鬪), 미승(靡勝), 불가전(不可戰), 불상응(不相應)의 뜻을 가지며 대체로 고대 인도의 성(城) 또는 나라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아유타와 관련한 음역어는 아유타(阿踰陀, 阿喩馱), 아비사(阿毘闍), 아비타(阿毘陀), 아수사(阿輸闍), 아영사(阿迎闍), 아요사(阿緰闍), 아유사(阿喩闍, 阿瑜闍, 阿踰闍), 아유차(阿踰遮), 아유타야(阿喩馱也, 阿喩駄也), 아비타처(阿毘陀處)의 10개의 음역어를 갖고 있으며 한자표기로는 14개가 된다. 이에 본 항목에서는 아유타와 관련한 10개의 음역어를 분석해 아유타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 인도 중부설

아유타(阿踰陀)와 관련한 한역 음역어를 분석해 보면 아유타의 지역은 대부분 인도 중부지역으로 파악된다. 이는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데 그곳에서 언급된 아유타는 다음과 같다.

“긍가(殑伽)강을 건너면, 아유타국(阿踰陀國)[중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아유타국의 둘레는 5천여 리이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며 곡식이 풍성하고 꽃과 열매가 매우 번성하다. -중략- 이곳은 벌소반도(伐蘇畔度:vasubandhu)보살[당나라 말로는 세친(世親)이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바수반두(婆藪盤豆)라고 하며 번역하여 천친(天親)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가 수십 년 동안 머물면서 대소승의 여러 논서들을 지은 곳이다. -중략- 옛날 경부(經部)의 실리라다(室利邏多)[당나라 말로는 승수(勝受)라고 한다]논사가 이곳에서 경부의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지었다. -중략- 이곳에서 아승가(阿僧伽)[당나라 말로는 무착(無着)이라고 한다]보살이 유익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범부들을 인도했던 곳이다. 무착보살은 밤에 천궁으로 올라가서 자씨보살의 처소에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장엄대승경론(莊嚴大乘經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등을 받아서 낮에 대중들을 위하여 미묘한 이치를 널리 강의하였다.”

“아야목거국(阿耶穆佉國)의 둘레는 2,400∼2,500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은 긍가하에 임해 있다. 둘레는 20여 리이며 기후와 풍토는 아유타국과 같다.”

이와 같이 현장은 '대당서역기'를 통해 아유타는 인도 중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지역은 아야목거국으로부터 상류 100여 리에 위치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대당서역기'에서의 아유타는 세친이나 그의 형인 무착이 기거하면서 유식학 관련 논서를 지은 곳일 뿐만 아니라 세친에게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경량부 논사 실리라다가 거주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대당서역기'의 이 내용은 진제(眞諦 499~569)의 '바수반두법사전'의 내용과도 대동소이한데, 거기에서는 아유타를 아유사(阿踰闍)로 음역하고 있다.

 

   
 
  ▲ 허황옥 공주가 모셔온 파사석탑.  
 

이는 현장(602?-664) 보다 약 1백 년 전에 이미 아유타라는 지명과 관련한 음역어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즉 현장 이전에는 아유타라는 지명은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외에 아유타와 관련한 음역어를 통해 지명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동음이어(同音異語)인 아유타(阿瑜陀)와 이음(異音)인 아비사(阿毘闍), 아비타(阿毘陀), 아수타(阿輸陀) 정도이다.

아유타(阿瑜陀) : 唐云無著. 應中印度阿瑜陀國(本生處者北印度犍馱羅國是也)其國王城西五百里.
아비사(阿毘闍) : 如是我聞. 一時. 佛住阿毘闍恒水邊.
아비타(阿毘陀) : 如是我聞。一時. 佛住阿毘陀處恒河側.
아수타(阿輸陀) : 1_又東南行六百餘里渡殑伽河南至阿輸陀國(中印度)周五千餘里都城周二十餘里. 2_又至阿輸陀國. 屬中印度. 都城北五里. 殑伽河岸大寺中塔.

이와 같이 아유타와 관련한 음역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유타라는 지명은 대부분 현장의 '대당서역기' 및 그와 관련한 논서를 통한 것이고 이외의 음역어로는 4개 정도가 해당된다.

따라서 한역 불전에서 아유타와 관련한 음역어를 통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유타는 인도 중부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국가이고 부처님 재세 당시 자주 설법한 곳이다. 더불어 불교의 신화적 내용과 관련해서는 이상적인 국가로 묘사되고 있는 지역이다.

▲ '라마야나'와 관련된 설

아유타와 관련한 또 하나의 설은 인도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에서 언급된 지명이다. 즉 '라마야나'에서는 라마가 태어난 곳을 아유타라고 하여 성스로운 장소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불전에서 언급하는 아유타는 곧 '라마야나'에서 언급하는 곳이며,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이 주장과 관련해 부연하자면 아유타는 '라마야나'에 나타난 사라유(Sarayu) 강변에 위치한 힌두교 제1의 정치적 성도인 야요디야(Ayodhya)의 음차이며 이 도시는 신화상으로는 존재하지만, 5세기 이전에는 실제 역사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은 도시라고 한다.

즉 이 도시는 당시 특정한 도시를 모델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사라유 강변에 위치한 사께따(Saketā)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 경 갠지스강 중류 지역에서 번성했던 20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그런데 5-6세기경 굽따(Gupta) 말 이후부터는 몰락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라마야나의 최종 편찬이 이루어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사께따가 아요디야의 이름으로 치환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5세기 초에 인도를 다녀 온 법현의 '고승법현전'에는 사께따라는 지명은 있지만, 아요디야에 대한 언급이 없고 대신 7세기 중반에 인도를 다녀온 현장은 아요디야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요디야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성도로 자리 잡은 것은 5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가락국기의 원전이 형성되는 7~8세기 이후에 허황후 설화가 불교적으로 윤색되는 과정에서 아유타가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인도 길상인 코끼리와 신어.  
 

다시 말해 야유타는 사께따라는 실제 도시를 '라마야나'에서 성도로 묘사함으로써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이며, 이 가상의 도시는 5세기 경에 사께따를 대신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증으로 법현의 '고승법현전'에는 아유타와 비슷한 지역이 사께따로 언급되고 있지만,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사께따라는 표현은 없고 대신 아유타를 쓰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의 아유타는 이 지명이 불교로 윤색되는 과정 중에 삽입된 것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허왕후가 서기 48년에 아유타국에서 왔다.”라는 내용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사께따와 관련된 설

위의 주장은 가야불교 전래를 인도 아유타라고 보는 견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론 중의 하나로 이 주장이 맞다면 기존의 가야불교 인도 전래설은 폐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논자는 이 논란의 핵심이 되는 사께따를 중심으로 아유타와의 관련설은 논구해 보고자 한다.

사께따는 산스끄리트 Sāketa(Pāil. Sāketa)의 음역어이다. 의역은 논사(論事), 취회설(聚會說)이며, 대체로 고대 나라 또는 지방의 이름으로 쓰인다. 이에 사께따와 관련한 음역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계다(沙計多, 沙鷄多, 娑計多, 娑雞多), 사갈타(娑竭陀), 사계도(娑雞覩), 사계제(娑雞帝), 사기다(娑祇多), 사비타(娑鞞陀), 사시다(娑翅多), 사지다(莎枳多, 娑枳多), 상기다(桑奇多, 桑岐多, 桑祇多, 桑祇哆, 桑祗哆), 상기타(桑祇陀, 桑祗陀), 승지다(僧枳多), 파계제(婆鷄帝), 파기타(婆岐陀), 파시다(婆翅多), 파지다(婆枳多). 사기(沙祇, 娑祇), 사소(娑掃), 사지(沙枝, 娑枳), 파기(婆祇).

이와 같이 사께따와 관련한 음역어는 19개이며 한문표기로는 29개이다. 이들 음역어는 모두 사께따가 나라 또는 지방의 이름인 것을 말하지만, 본 연구와 관련한 음역어를 중심으로 본다면 먼저 '고승법현전'에서 나오는 사기국(沙祇國)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승법현전'에서의 사기국은 간단히 두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에피소드 1 : 부처님이 버드나무 가지[楊枝]를 심었는데, 외도와 바라문들이 계속 꺽어 버렸지만, 나무가 계속 본래의 모습으로 자랐다는 것.
에피소드 2 : 네 분의 부처님이 경행하거나 쉬었던 곳에 탑을 세웠다는 것.

위와 같이 '고승법현전'에서의 사께따는 오직 이 두 가지 에피소드만 전할 뿐 그 나라에 대한 다른 정보가 없다.

이에 우선 위에서 주장한 '고승법현전'의 사께따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아유타로 개명되었다는 것과 관련해 두 논서를 비교해 보면 대한 현장의 묘사가 더욱 자세하고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에 대한 묘사 중 공통된 것이 있으니 바로 에피소드 2의 네 분의 부처님이 경행한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 2는 '대당서역기'를 보면 현장이 아유타국을 들러기 전에 머물던 갈약국사국의 납박제바구라성 주변에도 그리고 아유타국을 지나 머물던 아야목거국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만으로는 사기국, 즉 사께따가 아유타와 같은 곳이라는 것은 입증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께따의 에피소드 1인 버드나무 가지와 관련한 것을 보면 '대당서역기'의 아유타국에는 이 내용이 없지만, 비색가국(鞞索迦國)을 묘사하는 곳에서는 두 번째 내용과 더불어 첫 번째 에피소드를 설하고 있다.

즉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 이를 닦고서 그 남은 가지를 버린 곳인데, 버려진 가지가 뿌리를 내린 뒤에 무성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러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이나 외도 무리들이 앞다투어 와서 이 나무를 잘랐지만 금방 예전과 같이 자라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께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내용만을 근거로 본다면 '고승법현전'의 사께따에 대한 설명은 '대당서역기'의 비색가국과 일치할 뿐이다. 에피소드 2는 중인도 여러 나라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두 나라만의 일치성을 주장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 학술대회에 참가한 교수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께따가 아유타의 개명 전의 나라라고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주장은 “'대당서역기' 5권에 나오는 비색가국은 본래 이 Ayojjhā, 즉 Sāketa로서 같은 책에서 기록하는 바 아유타국은 뒤에 건설되어진 것이고 옛날 유명한 도시의 이름을 취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비색가의 설명에는 '고승법현전'의 버드나무 가지[楊枝]의 전설이 나온다. 또한 자따카(Jātaka)에서는 Kāḷasena왕이 다스린 도시를 Ayojjhā라고 하는데,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을 Sāketa라고 부르며, 니까야에서는 많은 부분 Sīketa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을 Sāketa로 본다.”고 한다.

이 주장은 결국 사께따=아유타=비색가로 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정보이다. 하지만 '고승법현전'의 사께따에 대한 설명은 '대당서역기'의 아유타와 일치하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중부 여러 나라에 공통된 내용인 에피소드 2뿐이다.

즉 에피소드 1에 대한 내용은 '대당서역기'의 아유타국에 대한 설명에는 없고 비색가국에 대한 설명에 있다. 이것만을 본다면 '고승법현전'의 사께따는 '대당서역기'의 비색가에 해당할 뿐 아유타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사께따=비색가일 뿐이다.

이것은 또한 '대당서역기'와 동시대의 책인 '법원주림'에도 나온다. 그 책에서는 아유타국을 아수타국(阿輸陀國)이라고 하며, 그 설명은 '대당서역기'와 대동소이하다.

또한 그 책에서는 '대당서역기'에서의 비색가국을 비삭가국(鞞索迦國)이라고 하여 '고승법현전'의 사께따와 관련한 에피소드 1과 2를 대동소이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더욱이 그 책에서는 비삭가국은 아수타국과 같은 중인도에 속하지만 거리상 몇 개의 나라를 거친 먼 곳에 있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고승법현전'의 사께따는 '대당서역기'의 비색가와 '법원주림'의 비삭가와 동일한 나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당서역기'와 '법원주림'에서 설명하고 있는 아유타(아수타)와는 다른 나라로 파악된다.

이는 '대당서역기'와 '법원주림'에서 아유타와 비색가를 각각 다른 나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두 나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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