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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대 값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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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대 값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 경상도 촌놈 조유식
  • 승인 2008.08.16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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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공중전화·카폰·삐삐·휴대폰까지
[통계로 본 60년의 변화]
전화 한 대 값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초등학생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지만 사실이다. 1980년대 전자식 교환기 도입으로 아무 때나 전화 가입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전화는 당당히 ‘재산목록 1호’였다.

1955년 전화가입자는 3만 9000명에 불과했다. 인구 1000명당 2대꼴이었다. 1962년부터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통신사업 5개년 계획에 착수하자 전화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공급이 따라가질 못했다. 이 마당에 전화를 사고팔 수 있도록 허용하니 전화 값이 천정부지로 뛴 건 당연했다. 당시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아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다.

하지만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정부가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전화 매매를 금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정치권과 언론이 들고 일어났다. 공급이 턱없이 모자란 판에 매매를 금지시키면 실수요자가 피해를 본다는 논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1970년 9월 1일 이전에 가입한 전화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새로 가입하는 전화는 금지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전자를 백색전화, 후자를 청색전화로 불렀다. 전화 색깔이 아니라 가입 대장의 색이 각각 흰색과 청색이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1970년 8월 31일 현재 전화가입자 수는 45만 7280명(서울 19만 6599명)이었으니, 그 사람들만 전화를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조치 후 전화 값은 더 뛰었다. 당장 전화가 필요한 사람은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백색전화를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78년 청색전화 신청 대기자는 무려 60만 명에 이르렀다. 백색전화 한 대가 260만원까지 치솟은 건 이 무렵이다. 서울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한 가격이었다.

전화 값 거품은 1978년 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오면서 비로소 꺼지기 시작했다. 1986년 한국이 세계에서 10번째로 디지털식 전자교환기(TDX)를 독자기술로 개발하면서 전화는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서민의 통신수단으로 거듭났다. 1988년 가입자 1000만 명, 1997년 2000만 명을 넘어 2007년 말 현재 2313만 명에 이르렀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꼴로 보급된 셈이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 공중전화는 서민의 애용품이었다. 국내 첫 무인 공중전화기는 1966년 6월 1일 시내 중심가 10곳에 처음 설치됐다. 그해 5월 경복궁에서 열린 국제산업박람회에 전시했던 것을 공중전화로 활용했다.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기는 1977년에 가서야 선보였다. 전화 부스마다 시외전화를 걸기 위해 줄을 선 풍경이 낯익었다. 1982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시내·외 겸용 DDD 공중전화가 나오면서 공중전화도 보편화했다.

같은해 한국통신공사(현 KT)에서 떨어져 나온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가 무선호출 서비스를 개시했다. 무선호출기, 소위 '삐삐’의 등장은 통신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1982년 235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6178배인 145만 2000명으로 늘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와 같은 숫자의 의미를 모르면 신세대 축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1997년엔 가입자가 1519만 4821명까지 불었다. 인구 세 명당 한 명꼴로 삐삐를 찼었다는 얘기다. 업계 1위였던 한국이동통신은 당시 세계 3위 가입자를 자랑했다.

삐삐의 대중화는 공중전화의 보급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휴대전화가 일반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호출 받은 사람이 급히 연락을 취할 수단은 공중전화뿐이었다. 그 덕분에 공중전화는 1997년 42만 3502대까지 보급됐다.

하지만 삐삐의 시대는 채 20년을 못 갔다. 무선호출 서비스가 시작된 지 불과 2년 뒤인 1984년 서울 구의동 광장전화국의 구석방에서 직원 32명으로 시작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차량전화 서비스팀이 국내 처음으로 카폰을 상용화한 것이다. 첫 해 가입자는 2658명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초라했다. 통화 품질도 떨어졌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이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올림픽 개막에 맞춰 서둘러 서울 및 수도권과 부산에서 휴대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전국 서비스는 1993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나마 전화기가 너무 커서 일반국민들의 실생활에 쓰기는 곤란한 상태였다.

단말기와 통신료 문제는 1995년 한국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면서 한꺼번에 풀렸다. CDMA 기술을 채택한 개인휴대전화(PCS) 사업자가 나타난 것이다. PCS 단말기는 휴대전화에 걸맞을 만큼 작아졌고 통신료도 쌌다. 기존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에 이어 1996년 PCS 사업자 3곳이 새로 시장에 진입했다.

1996년 318만989명이었던 휴대전화 가입자는 1년에 두 배씩 늘어나 1998년 1000만 명, 99년 2000만 명, 2002년 3000만 명에 이어 2006년 40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2008년 1월 말 현재로는 4374만 5450명에 달한다.

휴대폰의 등장은 삐삐와 공중전화 시대의 퇴조를 불러왔다. 둘 다 휴대폰 서비스가 상용화한 1997년을 정점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한때 신세대 젊은이의 필수품이었던 삐삐 가입자는 2008년 1월 말 현재 3만 9513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중전화 역시 1997년 이후 줄곧 줄다가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44만대 수준으로 늘었으나 그 이후 다시 급감해 2005년 14만대 안팎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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