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는 위서(僞書)다` -백제의 왜국 통치-

역사적 사실 180도 뒤집어 가공의 창작 역사로 날조 지난달 29일 김해상공회의소에서 출판기념ㆍ강연회 열려

2024-07-03     영남미디어공동취재단 신동호 기자

지난달 29일 오후 2시 김해상공회의소 대강당에서 ‘「일본서기」는 위서(僞書)다’ -백제의 왜국 통치- 라는 도서의 출판기념·강연회가 열렸다. 김해시사(史) 편찬과 관련하여 최근 쟁점이 되었던 가야 ‘임나일본부설’을 일축하는 내용의 책이다.

이 자리에는 사학계, 문화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참석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임나일본부설’이 근거 없는 낭설이고 조작되었다는 것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근거 없음’으로 공식 확인되었고 그간 많은 논문과 저서도 있었다.

이번에 출판한 ‘「일본서기」는 위서(僞書)다’ -백제의 왜국 통치-는 이원희 변호사가 저술한 책으로 상당한 정확성을 갖춘 근거와 간결한 서술로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도모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자 이원희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와 경남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 변호사는‘일본어는 고대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하여 일본 고대어와 고대사를 20여 년간 연구한 끝에 5~7세기에는 가야와 백제가 순차로 왜를 지배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5~7세기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가야와 백제 등 고대 한국 여러 나라에서 건너간 기마 문화, 토기, 환두대도 등의 무기, 귀걸이와 금동관 등의 장신구, 무덤의 형식인 횡혈식 석실, 불교와 한자 문화 등등, 고대 한국의 문화와 한국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역할을 빼놓고는 도저히 서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훨씬 선진적이던 이들의 여러 문물이 왜지를 점령하다시피 하였고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고 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도왜하였고 그들이 왜왕과 지배층이 되어 왜인들을 통치하였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당시의 왜는 100여 개 이상의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통일은 늦은 7세기 무렵에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왜가 백제와 가야, 신라, 고구려까지 지배하였다고 180도 뒤집어 가공의 역사로 날조하였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시조 신무부터 제37대 제명까지 37명의 왜왕은 창작된 가공인물이고 실제 왜왕은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이며 지배층은 백제의 귀족들이었다고 강조했다.

‘백제천(百濟川)’, ‘이마키(今來)’,‘ ~ 골’ 등 백제풍의 무수한 지명이 있었고 불교, 건축, 공예, 회화, 음악, 의복, 오락 등 상류층의 문화도 모두 백제풍이었으며 왜어에도 수많은 백제어가 침투하여 일본의 방언에는 지금도 펄펄 살아 숨 쉬는 듯한 고대 한국어가 무수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왜의 지배층 백제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백제가 멸망하자 왜인들을 영구히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철저히 왜인으로 동화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일본서기」도 곤지와 말다(후일의 동성왕), 사마(후일의 무령왕), 부여풍 등 여러 왕자들 그리고 아직기와 왕인 등 수많은 학자와 관리들의 도왜, 불교의 전래 등의 역사는 숨기지 못했다.

「일본서기」는 출발부터 창작된 위서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사람이 가필, 변작하여 더욱 흉측한 모습으로 변질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일본서기」의 본질을 직시하여 더 이상 이 위서의 망령에 농락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그는 또 2015년부터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와 「일본열도의 백제어」, 「천황가의 기원은 백제 부여씨」, 「속국 왜국에서 독립국 일본으로」, 「전라도 천년사를 비판한다」등 5권의 자신의 저서의 정수를 모아 이 책 한 권으로 압축한 것이라 했다.